민족 최대의 명절 설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여느 때보다 이른 설 명절이 반갑기만 하면 좋으련만 생각만 해도 가슴 한 편이 답답해지는 이들도 있죠. 남편 뒷바라지만 강요하는 시어머니, 걱정인지 염장인지 모를 말만 늘어놓는 친척들, 설 연휴에도 일하라는 사장님, 찬바람 불면 생각나는 '추억의 빌런'까지. 그들이 보고 무언가 깨달을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노래를 소개합니다.[편집자말]
"이번 달에는 청첩 모임이 다섯 번이나 있어."

큰 아이가 푸념을 한다. 요즘은 '청첩 모임'이라는 게 있단다. 그냥 고지서 내밀듯이 청첩장을 내미는 게 민망해서일까 밥이라도 한 끼 사는 게 요즘 젊은 세대의 새로운 풍속인 듯하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시대지만 아이들이 결혼 적령기에 들어서니 주변의 결혼 이야기가 자주 들린다. 더불어 만만치 않은 요즘 결혼 풍습도 간접적이나마 경험해 보게 된다. 얼마 전 지인들과 모임을 가졌던 작은 아이가 씩씩거리며 말을 전했다. 양가의 어른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하는 상견례, 그런데 장래의 시댁 어른들께서 '나 아들 가진 사람이야'라는 식의 태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셨다고 한다. 그런 장래 시부모님들의 태도에 장래 며느리될 사람은 '이 결혼을 해야하나?' 고민했다는데... 그 이야기를 전하던 작은 아이가 뒤끝있게 한 마디 덧붙인다.

"엄마도 시월드되는 거 아냐?"
 
시월드? 시대가 변했네요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의식도 변해간다지만, 의식의 변화는 그래프 상의 수치처럼 일괄적으로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 데 늘 문제가 생긴다. 우발적 방문으로 며느리가 힘들어하자 자기도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었다며 방문 자체를 자제하는 시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일하는 며느리에게 손주들에게 갓 지은 따뜻한 밥을 먹여야 한다며 훈계를 하는 시어머니도 있다.

특히나 매년 하는 김장은 이제 전통 행사가 아니라, 집집마다 세대 갈등을 빚는 질곡이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 전 친구를 만났는데 자랑스레 말한다. 자기 혼자 김장 몇 십 포기를 해냈다고. 그 얘기를 듣는데 가슴이 답답해 왔다. 그 얼마 전 나 역시 이모네 집에 가서 60kg의 '김장 지옥'을 경험했기 때문이었을까. 해먹을 게 없을 때 김치찌개나 김치 볶음을 해먹는다며 김장은 무조건 많은 게 좋다는 사촌 동생의 지론에 해마다 김장의 포기 수가 늘어 60kg에 육박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김치가 필요한 건 그 집 뿐이었다. 이제 나이가 드신 이모님은 김장 자체가 너무 버거워보였고, 무엇보다 그 집 며느리네는 김치를 잘 먹지 않는 집이었다. 그런데 가족 행사라는 이유만으로 김치를 잘 먹지도 않는 며느리가 와서 함께 김장을 담궈야 했다. 버무려 놓은 김치 속 주변으로 삥 둘러 쌓인 절인 배추들, 속을 넣어도 넣어도 끝이 없었다. 아들은 내년엔 맛있는 김치 사드릴 테니 이제 그만하자 한다. 과연 내년에는 김장이 없을까? 

자랑스레 김장을 담그는 이야기를 한 후 명절 때 음식 좀 하는 게 뭐 그렇게 힘든 일인 줄 모르겠다며 말을 이어가는 친구,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친구의 말을 막았다. 살림하는 게 좋다는 건 니 취향이지만, 절대로 그런 너의 생각을 장래 너의 며느리 앞에서는 입도 뻥끗하지 말라며. 김장이라든가, 갓 지은 따뜻한 밥 한 끼를 차리는 건 아름다운 먹거리 풍습(?)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습조차 시대와 상황에 맞게 변해가야 한다. 시대와 상황이 달라지는데 여전히 자신이 살아왔던 방식을 고집하는 건, 이른바 '시월드' 직행 티켓을 끊는 것이다.   

그저 사랑 얘기가 아니에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포스터.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설 명절을 앞두고 다시 한번 달라진 시대, 달라져야 할 가족 관계에 대해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다같이 보면서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영화로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을 권해보고 싶다. 우리나라에 개봉했을 때 제목에서 느껴지듯, 넷플릭스 다큐로도 등장하는 리치 아시안들의 '그사세'를 다룬 눈요기 영화라거나,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라는 평이 주류를 이루었다. 실제로도 이야기의 골격만 따지고 보자면 '신데렐라 스토리' 맞다. 그런데 2018 미국비평가협회를 비롯 크리틱스 초이스 , 할리우드 필림어워즈 등의 수상 기록은 이 영화가 그저 '웃기는 영화'이거나, 뻔한 '신데렐라 스토리'만은 아니라는 증명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건 멋지고 잘생긴 데다가 '리치'한 남자 주인공 닉(헨리 골딩 분)이 아니라, 영화 속 시월드 갈등의 두 주인공 시어머니 역의 양자경과 미래의 며느리 역의 콘스탄스 우이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로 2023년 골든 글로브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한 양자경, 그 전성기의 시작을 여는 작품이 바로 이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며느리가 될 레이첼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뉴욕에 사는 중국계 이민 2세, 경제학과 교수가 된 그녀는 첫 장면에서 게임 이론에 입각한 기지로 학생들이 다 보는 가운데에서 포커 게임을 승리로 이끈다. 당당한 뉴요커, 그런 그녀가 남자 친구 닉을 따라 싱가폴로 향한다. 그리고 디저트조차도 한 입만 먹겠다며 그녀의 것을 얻어먹는 알뜰하다 못해 궁색해 보이던 남자 친구가 알고보니 왕족과도 같은 싱가폴 재벌 집안의 외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홀어머니와 살며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뉴요커로 살아온 레이첼, 그녀는 시어머니 엘리노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눈치챈다. 반대하는 이유? '답정너'다. 홀로 딸 하나를 키우기 위해 공장이며 부동산 등의 일을 가리지 않고 살아온 레이첼의 어머니와 싱가폴을 넘어 아시아 전체에 영향력이 큰 재벌 집안은 비교할 거리조차도 안 된다.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우아해보이던 시어머니, 하지만 자신의 은근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레이첼이 포기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 주변의 여성들이 하듯 레이첼의 뒷조사를 하고, 숨겨진 출생의 비밀을 시할머니 앞에서 밝혀 레이첼을 몰아내려 한다. 이쯤되면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인기가 좋은 고부갈등의 저급한 버전인 셈이다. 

뒷조사까지 마다하지 않는 시월드 이야기 속에서 눈에 띄는 건 여주인공의 캐릭터이다. 이콰피나가 분한 여주인공의 하버드 대학 동기는 말한다. '너는 경제학과 교수야, 너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다. 학생들 앞에서 포커페이스로 상대방을 제압하던 그 게임이론의 능력자 교수도 막상 어마어마한 재벌 시월드 앞에서는 어쩔 수 없이 위축되고 만다. 더구나 시어머니가 첫 만남부터 자신을 맘에 안 들어하니 답답할 노릇이다. 게다가 닉의 전 여친을 비롯한 그곳의 여자들은 '굴러온 돌' 레이첼을 거의 '호러'급으로 괴롭힌다. '니가 감히!', 이런 식이다. 

고민도 하고, 눈물도 흘리던 레이첼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말한다. '난 경제학과 교수야, 닉이 아니라도 난 충분히 나로 살아갈 수 있어.' 자신도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들이미는 시어머니와 시할머니 앞에서, "내가 이 결혼이 싫다"며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온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절정은 눈이 돌아갈 만큼의 싱가폴 리치들의 사는 모습도 아니고, 로맨틱한 두 사람의 사랑이나 결혼 신청도 아니다. 제 아무리 재벌 중의 재벌이라도,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고통받는다면 기꺼이 걷어차겠다는 여주인공의 당당한 결정이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의 어머니 엘리노어에게 말한다. 당신이 언젠가 당신의 손주를 볼 수 있게 된다면, 지금 당신 대신 나를 선택하겠다는 당신 아들과의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내 덕분이라고. 감사하라고. 

한때 남편과 함께 캠브리지 법대를 다니다 결혼과 함께 학업을 포기하고 닉의 가문에 충실하게 살아왔던 시어머니 엘리노어. 하지만 시어머니는 그녀를 미덥게 여기지 않아, 한때 아들 닉을 데리고 가버리기도 했다. 결혼이라는 족쇄를 스스로 차고 어떻게든 닉의 가문 사람이 되려던 엘리노어, 그녀와 달리 아들이 데려온 레이첼은 다른 선택을 한다. 그런 시월드라면, 나는 필요가 없다고. 아마 시월드는 사절, 결혼은 선택이라는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 역시 또 다른 레이첼들이 아닐까. 
댓글1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미디어, 그리고 그림책, 다시 길을 떠나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