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케이블 채널 M.net에서는 지난 2010년부터 < UV신드롬 >과 < UV신드롬 비긴즈 >, <음악의 신>, <방송의 적>으로 이어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해 방송했다(<음악의 신>은 2016년 시즌2가 제작됐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란 미리 연출된 상황극을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촬영해 마치 실제 상황처럼 보이도록 제작한 것이다. 해외에서는 '거짓된'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Mock'과 합성해 '모큐멘터리'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실제로 2013년에 방송된 <방송의 적>을 보면 데뷔 당시부터 '천재뮤지션'으로 불리던 이적이 음악에는 별 관심도 없이 어린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추파를 던지는 인물로 그려진다.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다가 <슈퍼스타K2>에 참가하며 가수로 데뷔한 존박 역시 <방송의 적>에서는 그저 냉면 좋아하는 바보 캐릭터에 불과하다.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현실과 프로그램 캐릭터의 간극이 클수록 웃음포인트도 더욱 많아진다.

이처럼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최근 주로 예능프로그램에서 웃음을 주기 위한 장치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페이크 다큐멘터리는 영화에서 리얼리티를 극대화하기 위해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촬영기법이다. 그리고 한국의 대표적인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는 지난 2009년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세대의 여성배우 6명이 본인의 실제 이름으로 출연했던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이었다.
 
 <여배우들>은 흔쾌히 노개런티로 출연을 결정한 6명의 배우들 덕분에 저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여배우들>은 흔쾌히 노개런티로 출연을 결정한 6명의 배우들 덕분에 저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 (주)쇼박스

 
색다른 매력의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

1990년대 '충무로의 이단아'로 불리던 최야성 감독은 지난 1997년 <로켓트는 발사됐다>라는 제목의 독특한 영화를 선보였다(<로켓트는 발사됐다>는 최야성 감독의 5번째 장편영화였다).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최야성 감독이 <로켓트는 발사됐다>라는 영화의 시놉시스를 가지고 선·후배 배우들을 찾아가 섭외하는 과정을 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 당연히 최야성 감독을 비롯한 모든 배우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지난 2007년에는 <스카페이스>와 <언터처블>,<미션 임파서블> 등을 연출했던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이라크 전쟁을 소재로 한 신작 <리댁티드>를 선보였다. 이라크 전쟁 당시 실제 있었던 미군들의 이라크 소녀 강간 살해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을 활용해 리얼하면서도 충격적인 묘사를 극대화했다. <리댁티드>는 베니스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명작이지만 결코 감상하기 편안한 작품은 아니다.

J.J. 에이브럼스는 개봉 전 관객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 예고편이나 포스터를 잘 활용하는 제작자 겸 감독으로 유명하다. 에이브럼스가 제작한 <클로버필드> 역시 머리가 없는 자유의 여신상이 그려진 포스터가 공개되면서 개봉 전부터 많은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겼던 작품이다. 개봉 후에는 과도한 핸드헬드 촬영기법 사용으로 관객들에게 호불호가 크게 갈렸다.

지난 2014년 여름에 개봉했던 스티븐 퀘일 감독의 <인투 더 스톰>은 1996년에 개봉했던 얀 드봉 감독의 <트위스터> 이후 오랜만에 토네이도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였다. <인투 더 스톰>은 영화 속에 다큐멘터리 감독 피트(맷 월쉬 분)를 등장시켜 노골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촬영했다. <인투 더 스톰>은 국내에서도 개봉 당시 <명량>을 꺾고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200만 관객을 모았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사실 페이크 다큐멘터리 형식의 촬영이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는 극장 안 관객들을 가장 긴장시키는 호러 영화다. 한국의 나홍진 감독이 제작과 각본작업에 참여한 한국과 태국의 합작 영화 <랑종> 역시 페이크 다큐멘터리 기법을 십분 활용한 공포 영화다. <랑종>은 다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연극무대에서 주로 활동했던 배우들을 캐스팅했고 실제 사건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가상의 홈페이지를 제작하는 정성도 아끼지 않았다.

얼핏 보면 진짜 같은 여배우들의 기싸움
 
 <여배우들>은 평소 보기 힘든 배우들의 카메라 밖 모습을 엿보는 듯한 재미가 숨어 있다.

<여배우들>은 평소 보기 힘든 배우들의 카메라 밖 모습을 엿보는 듯한 재미가 숨어 있다. ⓒ (주)쇼박스

 
<여배우들>은 200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패션지의 특집화보 촬영을 위해 20대부터 6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여성배우 6명이 한 자리에 모이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다. 실제 현장에는 대략적인 대본이 있었지만 촬영장의 분위기와 다테일한 대사들은 대부분 배우들의 애드리브로 채워졌다. 따라서 엔딩 크레딧에는 이재용 감독과 6명의 배우들이 모두 '각본가'로 이름을 올렸다.

눈치 없이(?) 촬영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윤여정 배우는 친분이 있는 고현정에게 전화를 걸어 보지만 고현정은 아직 집에서 나갈 준비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지루한 마음에 담배를 피우려 해도 돌아오는 것은 막내 스태프의 "현장은 금연이에요"라는 차가운 이야기뿐. 결국 윤여정 배우는 배우들이 모두 모인 후 담배를 피우다가 '금연'이라는 막내스태프의 지적에 얼마 마시지도 않은 커피잔에 담배를 끄는 실수를 저질렀다.

<여배우들>에서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1971년생과 1975년생으로 출연진 가운데 가장 나이대가 비슷한 고현정과 최지우가 벌인 신경전이었다. 최지우가 전성기를 누리던 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0년 가까운 공백이 있었던 고현정은 최지우에게 혈액형이나 별자리 따위를 물어보며 최지우 성격의 결함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고현정의 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최지우는 휴게실에서 전화로 고현정의 흉을 보다가 고현정과 마주친다. 그렇게 고현정과 기싸움을 벌이던 최지우는 고현정의 이혼에 대한 루머까지 언급하며 본격적인 말싸움을 시작한다. 연장자인 윤여정 배우와 가장 어린 김옥빈이 복도에서 '맞담배'를 피는 장면도 <여배우들>의 색다른 재미다.

쥬얼리를 착용한 표지촬영만 남겨둔 6명의 여배우들은 일본에 내린 폭설로 보석도착이 늦어지자 크리스마스 이브에 눈이 내리자 대기실에서 샴페인 파티를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여기서 <여배우들>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팬이라면 놓치기 아까운 배우들의 솔직한 이야기들이 대방출 된다. 그렇게 나이도 다르고 각자 살아온 방식도 달랐던 6명은 '여배우들'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즐겁고 뜻 깊은 하룻밤을 보낸다.

슬럼프 빠진 이재용 감독의 재기작?
 
 윤여정 배우와 이재용 감독은 <여배우들>을 시작으로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와 <죽여주는 여자>까지 세 편을 함께 했다.

윤여정 배우와 이재용 감독은 <여배우들>을 시작으로 <뒷담화: 감독이 미쳤어요>와 <죽여주는 여자>까지 세 편을 함께 했다. ⓒ (주)쇼박스

 
이재용 감독은 장편 데뷔작 <정사>에서는 연하남과 주부의 불륜,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에서는 조선시대의 억압된 정조관념에 도전하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뤘다. 하지만 이를 담아내는 시선은 언제가 정갈하고 덤덤했으며 화면은 상당히 깔끔했다. 하지만 이재용 감독은 지난 2006년 4번째 장편영화 <다세포 소녀>를 통해 파격적인 실험을 했고 감독 데뷔 후 처음으로 평단과 관객들로부터 엄청난 혹평을 받았다.

이재용 감독은 <다세포 소녀>의 참패 후 명예회복이 시급한 시점에 실험정신을 담은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여배우들>을 연출했다. 그리고 감독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한 배우들의 노련한 연기 덕분에 <여배우들>은 이재용 감독에게 51만 관객보다 더욱 의미 있는 성과를 안겨줬다. 실제로 <여배우들>은 베를린 영화제를 비롯해 8개의 국제영화제에 출품되며 해외관객들을 만났다.

6명의 주인공을 제외하고 <여배우들>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배우(?)는 화보촬영을 총괄하는 김부장을 연기했던 김지수 기였다. 실제 유명 패션지의 에디터를 거쳐 현재는 문화전문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김지수 기자는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라는 인터뷰 코너를 연재하며 빌 게이츠와 말콤 글래드웰, 오은영, 장기하 등 국내외 많은 셀럽들을 인터뷰했다. 김지수 기자는 <여배우들>에서도 신인답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였다.

<여배우들>에는 단역으로 출연했던 배우들 중 영화 후반부 고현정이 다른 배우들에게 인사시켰던 신인 에밀은 현재 대중들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있는 배우 유태오가 연기했다. <여배우들>을 통해 한국에서 배우로 데뷔한 유태오는 2019년 칸 영화제에 초청 받은 러시아 영화 <레토>에서 빅토르 최를 연기하며 주목 받았다. 유태오는 오는 2월 공개되는 넷플릭스 드라마 <연애대전>에서 <여배우들>에 함께 출연했던 김옥빈과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여배우들 이재용 감독 고현정 윤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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