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인물들의 심리를 탐구해봅니다. 그 때 그 장면 궁금했던 인물들의 심리를 펼쳐보면, 어느 새 우리 자신의 마음도 더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편집자말]
"충분하다."
 
새해를 시작하며 마음속에 떠올린 단어다. 분주하기는 했지만, 어딘가 공허했던 2022년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2023년이 끝날 땐 '이만하면 충분했어'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 생각했다. 이런 바람으로 삶의 매 순간 '충분함'을 느끼면서 살아보자 다짐하며 새해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올해 첫 드라마로 지난해 <재벌집 막내아들>을 시청하느라 미뤄 두었던 ENA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를 택했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주인공 여름(김설현)은 놀랍게도 드라마의 말미 이 말을 반복한다.
 
"충분하다." (12회, 여름)
 
나는 여름의 이 말이 새해를 여는 내게 거는 주문처럼 반갑게 들렸다. 정말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같았다. 공허와 무기력, 지루함으로 가득했던 여름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삶을 충분하게 채워가는 모습들은 심리학적으로도 매우 타당해 보였다. 여름이 알려준 '충분한' 삶을 사는 법을 살펴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충만한 시간들을 채워간 여름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포스터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충만한 시간들을 채워간 여름의 이야기를 담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포스터 ⓒ ENA

   
불안을 수용하는 용기

 
여름은 6평 원룸과 회사를 오가며 하루를 보내는 출판사 직원이다. 밤에는 매일 무언가에 쫓기는 꿈을 꾸고, 아침엔 겨우 일어나 '지옥철'을 타고 회사에 간다. 회사에서는 인내심을 발휘해 온갖 궂은 일을 하고, 퇴근 후엔 오래된 애인과 무미건조한 만남을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애인은 이별을 통보해오고, 든든한 지지자였던 어머니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간신히 버티던 여름은 어느 날 출근길 지하철을 반대로 타는 일탈을 감행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서울 반대로 가는 평일 오전의 지하철은 같은 세계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한산하고 조용하고 평화롭다. 어쩌면 인생도 이렇지 않을까. 남들과 다른 반대쪽을 향해 가면 좀 더 한산하고 좀 더 조용하고 좀 더 평화롭지 않을까.' (1회)
 

결국 여름은 이 생각을 실행에 옮긴다. 6평 원룸의 물건들을 배낭 하나에 담을 만큼만 남기고 처분한 후, 배낭 하나만 메고 바다가 있는 시골 마을 안곡에 도착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1년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아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안곡 사람들은 이런 여름을 그다지 환영하지 않는다.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노력하는 걸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이곳의 몇몇 사람들은 빈둥거리는 여름을 이질적 존재로 바라본다. 특히 7급 공무원이 되어 안곡을 떠나고자 노력하는 지영(박예영)은 여름에게 대뜸 이렇게 묻는다. "그렇게 살면 안 불안해?" 이에 대해 여름은 이렇게 답한다.

"불안해요." (5회)
 
나는 여름의 이 답이 참 솔직하다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 사회에서 사람을 매우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여름은 '불안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남의 기준에 맞춰 살다가 병이 났으니, 이제 저랑 친해지는 중"이라며 이 불안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심리학적으로도 정말 그렇다. 불안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고 가야 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불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무언가를 더 하고 쫓기듯 살아간다. 그렇지만 불안을 인정하고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는 순간, 우리는 '불안해도 괜찮은' 상태가 된다. 여름은 '불안해도 괜찮다'는 걸, 그러니까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용기를 낼 수 있었기에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삶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름은 마침내 '충분하다'며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여름은 마침내 '충분하다'며 삶의 충만함을 느낀다. ⓒ ENA

 
해보지 뭐, 안 되면 말고
 
불안을 수용할 수 있게 된 여름은 목표 대신 내면의 욕구를 따르는 용기도 낸다. 여름은 도서관에서 사서로 일하고 있는 대범(임시완)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안곡에 오기 바로 직전 애인에게 상처를 받은 여름에게 사랑은 두렵기만 하다.
 
8회 여름은 이런 자신의 마음을 성찰하면서 '더 이상 슬픈 일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다'고 주저하지만, 곧바로 '개 폼 잡고 있네'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대범에게 달려간다. 이때부터 둘은 가까워지고 서로를 보살피는 관계가 된다. 아마도 여름이 과거의 상처를 반복하지 않는 데 그러니까 '회피'하는 것에 몰두했다면 이런 용기는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안을 감내하는 데 익숙해진 여름은 '해보지 뭐, 안 되면 말고'라는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을 택할 수 있었다.
 
이는 또한 자신의 마음과 대범의 마음을 분리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여름은 '대범이 나를 좋아할까'가 아니라 '내가 대범을 좋아하는지'에 초점을 두고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상대의 마음은 상대의 것이니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내 마음을 존중해주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테니 말이다. 이런 용기가 여름에겐 대범과의 좋은 관계로 나아갈 수 있게 했을 것이다.
 
사실 그렇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안 될까봐' 걱정하느라, 혹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신경을 쓰느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시작하지 못한다. 하지만, 해보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나 자신하고 친해지기 위해서는 여름처럼 일단 '해보지 뭐 안 되면 말고'의 자세도 필요하지 않을까.
 
다 괜찮은 거야
 

그리고 여름과 안곡마을 사람들은 보여준다. 삶에서 일어나는 일은 웬만하면 '다 괜찮다'는 것을. 9회 여름에게 한글을 배우러 온 봄의 할머니 명숙(김혜정)은 여름이 "심심하다"고 하자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심심해도 괜찮고 바빠고 괜찮고 다 괜찮은 거야. 그게 사람 사는 건데." (9회)
 
정말로 그랬다. 여름이 머무는 동안 안곡 사람들에게는 많은 일들이 벌어진다. 봄(신은수)은 알콜중독 아버지의 칼에 찔리는 사고를 당하고, 명숙은 살해 당한다. 근호(김요한)는 살인범으로 오해를 받고, 대범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연구에 이용당한다. 할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다시 도박에 빠졌을 때 봄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크고 작은 일들이 항상 벌어졌지만, 그래도 이들은 다시 평온을 되찾는다. 그리고 여름은 드라마의 말미 이렇게 회상한다. "괜찮다고 말하고 나니까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12회). 심지어 삶을 포기하려던 봄도 그 순간 "괜찮다고 말하자 신기하게 정말 다 괜찮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고백한다.
 
여기서 기억할 건, 바로 이들의 삶이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일들은 항상 벌어지고, 그 일들은 삶에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여름과 안곡 사람들은 그 흔적들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변화해감으로써 전과 같지는 않지만 또 다시 '괜찮아'지곤 했다.
  
 여름과 안곡마을 사람들은 여러 일들을 겪지만, 결국 다시 '괜찮은' 상태가 된다.

여름과 안곡마을 사람들은 여러 일들을 겪지만, 결국 다시 '괜찮은' 상태가 된다. ⓒ ENA

 
결국 삶은 '다 괜찮은 것' 아닐까. 나의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밀어내지 않고, 수용하고 바라볼 용기만 낼 수 있다면 말이다. 여름은 안곡에서 불안해도 괜찮고, 내 마음의 소리를 따라도 괜찮고, 때론 삶이 힘들어도 괜찮다는 걸 알았기에 마침내 "충분하다"며 미소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올 한 해 우리도 이렇게 살아보면 어떨까. 불안을 받아들이고, '해보지 뭐 안 되면 말고'라는 마음으로 용기도 내어보고, 힘들 땐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해주는 거다. 그렇게 살아간다면 2023년을 우리도 '충분하게' 살아낼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충분하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모르지만, 나는 지금 충분하다. 살아보자.' (12회)
 
여름의 마지막 말이다. 이 말을 마음에 새기며 일단 '살아보자'.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송주연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serene_joo)와 브런치(https://brunch.co.kr/@serenity153)에도 실립니다.
아무것도하고싶지않아 김설현 임시완 충분한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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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상담심리사. 심리학, 여성주의, 비거니즘의 시선으로 일상과 문화를 바라봅니다.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있는 그대로 존중받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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