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M의 첫 솔로 정규 앨범 [Indigo]
BIGHIT MUSIC
"랩을 번안하는 기계가 됐고, 영어를 열심히 하면 내 역할은 끝났다."
지난 6월, 방탄소년단의 단체 활동 중단을 선언하는 영상에서 리더 RM은 오랜 고민을 털어놓았다. 방탄소년단은 지난 5년 동안 그 어떤 아시아 팝스타도 가본 적 없던 길을 개척했다. 'Dynamite'와 'Butter', 'Permission To Dance'를 모두 빌보드 핫 100 차트 1위에 올려 놓으며, 지구상 최고의 팝스타의 자리를 공고히 했다.
그러나 즐거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RM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어떤 메시지를 던지느냐가 되게 중요하고 살아가는 의미인데, 그런 게 없어졌다"고 토로했다. 그 진솔한 고백으로부터 반년이 지나, RM의 첫 솔로 정규 앨범 < INDIGO >가 발표되었다. 그가 던지고 싶었던 이야기가 베일을 벗었다.
고 윤형근 화백(1928-2007)의 육성이 앨범 첫 트랙 'Yun'에 깔려 있다. 이 곡은, 앨범의 방향성을 말해준다. < INDIGO >는 예상보다 더욱 사색적이며 개인적인 앨범이다. 앨범의 커버 사진에 RM 뒤로 윤형근 화백의 작품이 걸려 있는 것 역시 미술 애호가로 알려진 RM 개인의 취향과 맞닿아 있다. 첫 곡에서 그는 슈퍼스타로서의 자아, 그리고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자아를 대비시킨다. "예술을 하기 전에 인간이 되어라"라는 윤형근 화백의 메시지는 네오 소울의 거장 에리카 바두의 목소리에 담겨 구전(球電)된다.
"팀 빠진 넌 사실 뭣도 아니야 너는 고속도로서 오솔길로 가려 해 너는."
- 'Yun'
RM이 소개하고 싶었던 목소리
이어지는 'Still Life'는 경쾌한 펑크 사운드 위에서 떳떳한 오늘을 노래한다. '멈추지 않는 정물화'라는 역설적 표현이 재미있다. RM의 오랜 음악적 우상인 에픽하이의 타블로와 함께 부른 'All Day'는 에픽하이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앨범의 시작점이 된 트랙 '건망증'에서는 바쁜 삶 속에서 소중한 것을 잊는 부끄러움을 노래했다. 김사월의 나른한 목소리가 설득력을 더 했다.
이 앨범의 트랙 리스트가 발표되었을 때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참여진의 넓은 스펙트럼이었다. < INDIGO >에서 RM은 앨범의 주인공이자, 대중 음악의 큐레이터가 되기를 자처했다. 이 큐레이션에는 철저히 그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자신이 사랑했던 음악 세계에 대한 경외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라인업이다. 올해 그래미 어워드 올해의 노래상을 수상한 팝 아티스트(앤더슨 팩), 네오소울의 거장(에리카 바두), 영국 알앤비(마할리아), 한국 인디 포크(김사월), 한국 힙합(타블로, 폴 블랑코) 등이 공존하는 앨범은 상상하기 어렵다. 오랫동안 우정을 이어 온 못의 이이언, 두 번째 믹스테이프 < mono >에 참여했던 혼네(HONNE)의 이름도 찾아볼 수 있다.
폴 블랑코의 참여는 바밍타이거와 합작한 '섹시느낌'에 이어, 지금 한국 힙합 신과의 상호 작용을 놓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표다. 어떤 1990년대생에게나 어린 시절의 추억으로 남아있을 체리필터의 조유진은 타이틀곡 '들꽃놀이'에 참여했다. 다양한 시대와 신(scene)의 음악이 만나 뒤엉키면서도, 모든 곡이 콜라보 상대의 색깔에 맞춰져 있다. 역시 RM의 음악적 우상인 윤하의 < Just Listen >(2013) 앨범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슈퍼스타의 진솔한 소품집
▲ RM Live in New York @ Dia Beacon ⓒ BIGHIT MUSIC
박지윤이 힘을 보탠 'No. 2'의 차분함과 함께 앨범은 문을 닫는다. < Indigo >는 빌보드를 지배한 슈퍼스타의 앨범보다는 다양한 음악을 즐겨 듣는 음악 팬의 플레이리스트, 혹은 소품집 그 사이에 있다. 10대 시절부터 힙합을 시작해왔던 그이지만, 힙합으로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다.
그렇다고 해서 차트 상위권을 노린 팝 음악을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번 앨범과 같은 피쳐링 구성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오소울, 펑크, 일렉트로니카, 포크, 시티팝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자기 세계에 끌어들이면서도, 아티스트의 자의식이라는 구심점을 잊지 않았다. 백화점식 구성을 취한 앨범이 산만하게 들리지 않는 이유다.
"타는 불꽃에서 들꽃으로 소년에서 영원으로
나 이 황량한 들에 남으리 아 언젠가 나 되돌아가리
- '들꽃놀이' 중
얼마 전 팀 멤버인 슈가와 함께 방탄소년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 출연한 RM은 "차트 1위로 남는 곡보다는 사람들한테 은은하게 전통주의 향처럼 오래 남아서, 플레이리스트에 한 곡이라고 들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이 앨범이 은은한 향을 남길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무엇일까. 감성적이고 차분한 접근법일 수도 있고, 이야기에도 있을 것이다.
그는 사색과 고민이 '중립 기어'와 필터 버블로 대체되는 세태를 논하며, 서른 바라보는 젊은이의 고민, 누구에게나 스쳐 갔을 외로움을 털어놓는다. 고속도로 대신 오솔길을, 화려한 불꽃놀이 대신 들꽃놀이를 택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한다. 누군가의 솔직한 일기장을 엿보는 듯해 즐겁다. 이 정도면, 세상에 이야기를 하고 메시지를 던지는 그의 역할은 충분히 완수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