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은 조선시대의 여러 임금 중에서도 가장 파란만장하고 논쟁적인 삶을 살다간 인물로 꼽힌다. 세자 시절에는 임진왜란이라는 희대의 국난에서 조선을 이끈 영웅이었고, 왕이 된 이후에도 '실리 외교' 등으로 나름의 치적을 남겼다는 평가받는다.

하지만 또다른 이면에는 수많은 정치적 과오를 남기며 끝내는 폐위당 한 '폭군'이자 '역사의 패자'가 되는 불행한 결말을 피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도 광해군은 역사적으로 과대평가와 과소평가가 나란히 공존하는 기묘한 인물로 통한다.
 
11월 30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강연 프로그램 <벌거벗은 한국사> 32회에서는 '임진왜란의 영웅 광해군은 왜 쫓겨났나' 편을 통하여 조선 15대 국왕 광해군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임진왜란의 전쟁영웅 광해군

광해군의 인생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국난을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당시의 광해군은 세자로서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최전선에서 분조(分朝)를 이끌며 흔들리던 민심을 수습하고 무너진 왕실의 권위를 되찾는 데 기여한 전쟁영웅이었다.

또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그 뒤를 이은 인조 정권의 무능에서 비롯된 정묘-병자 두 호란은, 그의 실리외교 정책이 재평가 받으며 '광해군이었다면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인식과 함께 실패한 개혁군주로서 재조명 받는 계기가 됐다.

'인간이자 국왕으로서' 광해군을 만드는 데 모두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 인물은 단연 아버지 선조였다. 조선 최초의 방계(주된 혈통에서 갈라져나가거나 벗어난) 승통 임금인 선조는 선대인 명종의 후손이 아니라, 할아버지 중종과 후궁 창빈 안씨의 후손인 덕흥군의 아들이었다. 이로 인하여 정통성에 민감했던 선조는 자신의 후계자는 반드시 직계인 적자로 세우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정작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이었고 그나마도 둘째였다.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는 20년이 넘도록 아들을 낳지 못했다. 선조는 많은 아들이 있었지만 저마다 결격사유가 있어서 즉위 후 25년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광해군은 '행동을 조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중외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상(선조)이 가려서 세웠다'고 기록하며 군왕의 자질이 있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1592년 발생한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은, 광해군이 뒤늦게 세자에 오르는 계기가 됐다. 선조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파천(임금이 수도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는 것)을 선택했다. 전시에 왕의 목숨조차 장담할 수 없는 위기 상황이었고, 조정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후계자를 지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자책봉 논의가 나온 지 불과 하루 만인 4월 29일 18세의 광해군은 전격적으로 조선의 세자가 됐다. 하지만 세자가 되었다는 기쁨을 누릴 새도 없이 광해군은 하루 만에 선조와 함께 경복궁을 떠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광해군이 세자에 오른 지 약 한 달 만에 선조는 충격적인 지시를 내린다. 조정을 둘로 나누어 왕세자에게 분조를 이끌라는 명을 내린 것. 왕이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권력을 세자와 나눈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선조는 사실 전황이 불리해지자 조선을 떠나 안전한 명나라로 달아날 생각을 하고 있었고, 광해군만 남기고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고 했던 것. "천자의 나라(명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 선조의 핑계였다.
 
분조를 맡게 된 광해군은 혼란에 빠진 조선을 수습하기 위하여 먼 길을 떠나야 했다. 광해군은 세자의 몸으로 위험한 전선을 넘나들며 들판에서 노숙을 하기도 하고, 일본군의 위협을 피하느라 갖은 고생을 해야 했다.

광해군은 그럼에도 강원도와 평안도, 황해도의 여러 고을을 옮겨다니며 수령이 달아나 공석이 된 마을의 수령을 새롭게 임명했고, 지방 관리들의 상소와 보고를 처리하며 전란을 수습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임진왜란으로 한동안 마비되었던 행정시스템은 젊은 세자와 분조의 활약에 힘입어 차츰 다시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시작했다. 흔들렸던 민심도 회복됐다. <피난행록>에 따르면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여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전란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에게 광해군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줬다.
 
권위 추락한 선조와 민심 얻은 광해군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한편 망명을 시도하려던 선조의 계획은 명나라의 사실상 거부로 불발됐다. 대신 명나라는 조선에 지원군을 보냈고, 조선은 이에 힘입어 1년 만에 전세를 뒤집고 반격에 나섰다. 선조는 한양이 수복된 이후 환도했다. 선조의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의 권위와 달리, 어엿한 전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준 아들 광해군과 그에게 기우는 민심이었다.
 
선조는 한양 환도와 함께 분조를 해체하고 아들 광해군에게 정식으로 양위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놀란 광해군과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반대했다. 이는 선조의 진심이 아닌 광해군과 신하들을 시험하기 위한 정치적 행위에 불과했다. 만일 선조가 양위하지 않는다면 이를 적극적으로 막지 않은 신하는 불충, 광해군은 불효의 죄를 뒤집어쓰게 되기 때문.
 
광해군은 식사도 거른 채 양위 명령을 거두어줄 것으로 간절히 호소했다. 처음부터 이를 노렸던 선조는 간청을 받아들여 양위 선언을 거두어들이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광해군에게 쏠린 민심을 다시 자신에게 가져오고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조의 이러한 양위 퍼포먼스는 임진왜란 7년간 무려 18번이나 반복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도 광해군에 대한 선조의 견제는 계속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문안을 온 광해군에게 선조는 "어째서 세자의 문안이라고 오느냐, 너는 임시로 봉한 것이니 다시는 여기에 오지 말아라"고 막말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고 질투가 심했던 선조는, 전쟁영웅인 이순신이나 의병장들을 견제했던 것처럼, 아들 역시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정적으로 대했다. 속상함을 이기지 못한 광해군은 피까지 토했다.
 
광해군의 정치적 약점은 당시의 관행상 상국인 명나라 황제의 정식 책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명나라는 광해군이 장자가 아닌 둘째라는 이유로 무려 5번이나 책봉에 퇴짜를 놨다. 또한 선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여 명나라를 핑계로 광해군을 압박했다.
 
불안한 입지의 광해군에게 또다른 위기가 찾아온다. 바로 선조가 그토록 기다리던 적장자가 탄생한 것이다. 의인왕후가 후손을 낳지 못 하고 사망하면서 선조가 새롭게 맞아들인 인목왕후는 4년 만에 아들 영창대군을 낳는다. 물론 조선시대의 질서는 이미 후계자가 정해진 상홍에서는 훗날 적자가 태어나더라도 번복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아들인 광해군을 미워했던 선조는 광해군을 폐하고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고 싶어했다는 게 문제였다. 광해군에게는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을 것이다.
 
1607년 10월, 선조가 병으로 위독한 상황에 놓인다. 그런데 선조가 지목한 후계자는 영창대군이 아니라 광해군이었다. 당시 28세로 10년이나 세자의 지위를 유지해왔던 광해군과 달리, 아직 두 살에 불과한 영창대군은 아무런 세력이 없었다. 선조로서도 마지못해 내릴 수밖에 없었던 선택이었던 것. 4개월 후 선조가 55세의 나이로 승하하면서 광해군은 마침내 조선의 15대 국왕에 오르게 된다.
 
광해군이 '비정한 독재자'가 된 이유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험난했던 왕위 등극 과정은 광해군을 '젊고 총명한 명군'에서 '비정한 독재자'로 바꾸어놓았다. 광해군은 자신의 정통성에 걸림돌이 되는 친형 임해군을 역모죄를 이유로 유배시킨다. 임해군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배지에서 수상한 죽음을 맞이했지만 광해군은 별다른 진상조사 없이 형을 애도하는 모습만 보이고 사건을 대충 마무리한다.
 
당시 망나니로 악명높았던 임해군은 조선 백성들에게는 미움의 대상이었지만 선조의 장자였기에 광해군에게는 언제든 자신의 용상을 위협할 수 있는 정적이었다. 명나라가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줄곧 거부해온 것도 임해군의 존재 때문이었다. 임해군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지 얼마되지 않아 명나라는 책봉사를 보내어 비로소 광해군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한다.
 
광해군은 집권 초기, 왜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전후복구 사업을 비롯하여, 당파를 가리지 않는 고른 인재 등용, 국방력 강화, <동의보감> 편찬, 대동법 시행 등 여러 가지 선정과 개혁정책을 의욕적으로 단행하며 민심의 지지를 얻었다.
 
하지만 세자 시절에 받은 회한과 상처 때문이었을까. 왕권을 향한 집착은 광해군을 점차 폭주하게 한다. 광해군 5년, 1613년 벌어진 은 강도 사건에서 비롯된 역모 사건에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는 광해군의 역린을 건드렸다. 김제남과 아들들은 모두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2월, 9세의 영창대군은 유배지에서 잔혹하게 살해된다.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영창대군이 빨리 죽지 않을까 걱정하여 온돌에 불을 때서 뜨겁게 하여 태워죽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선의 국법상 15세 이하의 미성년자는 성인이 되고 나서야 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왕위에 대한 트라우마와 불안감이 광해군을 폭주하게 만든 것이다.
 
광해군은 임해군 때와 마찬가지로 별다른 조사없이 영창대군 사망 사건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이는 민심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측근들마저 다수 등을 돌리게 되는 결정적인 자충수로 작용한다.
 
광해군의 마지막 목표는 영창대군의 친모이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였다. 광해군은 덕수궁에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명칭을 서궁으로 격하할 것을 지시했다. 오늘날의 가택연금이다. 엄연히 법적으로 의붓어머니이자 왕실의 어른을 유폐한 것은, 유교적 질서를 강조한 조선 역사상 전무후무한 '패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광해군의 만행을 가리켜 '폐모살제(廢母殺弟)'라 한다. 어머니를 폐위하고 종속(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또다른 실책, 풍수설에 집착한 '궁궐 건축'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스토리

 
한편 광해군 치세의 조선은 또다른 혼돈스러운 국제질서에 직면해있었다. 중국은 만주를 중심으로 흩어져있던 여진족이 후금(훗날의 청)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광해군은 "조선은 전란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수만의 군대를 동원할 능력이 없고, 군인들은 실전경험이 없는 농부들이다. 압록강변에서 마음으로 응원하겠다"고 답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힌다.
 
여기에는 조선의 국력이라는 실리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책봉문제로 명나라에 대한 광해군의 감정이 좋지 않았다는 것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거듭된 압박과 신하들의 요구에 못 이겨 결국 일시적으로 원군을 파병했지만, 장수들에게 따로 밀명을 내려 적극적인 전쟁 개입을 금지시켰다. 명나라의 추가적인 파병 요구는 또다시 단호하게 거절했다. 형식적이나마 명나라를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의 국왕이 명 황제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대부들이 포진한 조정에서는 "명나라는 조선의 부모국이자 왜란 때 은혜를 베푼 은인인데, 부모와 은인이 도와달라고 하면 목숨을 걸고서도 도와야 한다"는 주장이 쏟아졌다. 이미 '효'를 저버렸다는 평가를 받던 광해군으로서는 명나라마저 배신하며 '충'까지 버린 모양새가 되어 정치적으로 더욱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신하들은 급기야 조정 출석을 거부하며 파업까지 벌이며 광해군을 더욱 난처하게 했다.
 
가뜩이나 궁지에 몰려가던 광해군의 또다른 실책은 '궁궐 건축'이었다. 왕위에 대한 불안감에 시달리던 광해군은 '풍수설'에 집착하기 시작했고, 인왕산에 왕기가 있다는 소문을 접하자 왜란 전후로 국가 경제가 아직 피폐한 상황에서 인왕산 인근에 궁궐을 두 개나 동시에 짓는 대규모 공사를 강행했다. 무리한 궁궐 공사와 국고 낭비가 극심해지고 민심 이반이 가속화되었다. 공사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지자 매관매직까지 일삼으며 공물을 바쳐 관직를 따냈다는 '오행당상'이라는 표현은, 오늘날 관용어로 쓰이는 '따놓은 당상'이라는 말의 어원이 됐다.
 
이 무렵의 광해군은 이미 총명하고 담대하던 세자 시절의 광해군이 아니었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왕위에만 집착하게 된 광해군은 풍수, 도참, 미신에 빠져들었다. 민심도 광해군에게 등을 돌린 상황에서 1623년 3월 13일, 마침내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의 치세는 하루아침에 종말을 고한다.
 
서궁에 유폐되어있던 인목대비는 반정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왕실의 어른으로 복귀한다. <인조실록>에는 "유폐되어 살면서 오늘날까지 죽지 않은 것은 오직 오늘날을 기다린 것"이라는 인목대비의 어록에서 피맺힌 한이 느껴진다. 광해군은 인목대비 앞에서 폐위되어 비참하게 무릎을 끓어야 했다. 또한 광해군을 무너뜨린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은 놀랍게도 광해군이 궁궐을 짓기 전까지 인왕산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풍수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정작 광해군은 폐위된 이후에도 장수했다. 광해군은 장장 18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 8월 7일 향년 66세의 나이로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연산군같은 전형적인 폭군도, 무능한 암군도 아니었다. 오히려 세자 시절까지만 해도 만인의 기대와 사랑을 받던 '준비된 왕'처럼 보였던 광해군은 정작 즉위하고 나서는 왜 실패한 왕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바로 어린 시절부터 누적된 왕위에 대한 불안감과 트라우마 때문이었다. 한 사람이 평생을 살면서 받는 상처의 81% 이상이 부모로부터 받는 상처라고 한다. 전임자이자 아버지인 선조로부터 존중과 애착을 받는 관계가 형성되었더라면, 광해군의 치세와 인생은 물론, 이후의 한국사 역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는 이유다.
광해군 한국사 폐모살제 임진왜란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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