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소녀시대가 5년 만의 신곡 'FOREVER 1'을 발표했을 때, 멜론 음원 차트에는 아주 흥미로운 풍경이 펼쳐졌다. 2세대 걸그룹의 전설인 소녀시대를 비롯해 블랙핑크, (여자)아이들, 아이브, 뉴진스, 잇지 등 다양한 걸그룹들이 모두 10위권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멜로망스를 제외하면 실시간 음원 차트 10위권에 오른 팀이 모두 걸그룹이었다.

계절이 한 번 바뀐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10월 25일 기준, 멜론 차트 10위권에서 지코와 크러쉬, 윤하를 제외한 7곡이 모두 걸그룹의 노래로 채워져 있다. 최근 수년 동안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걸그룹의 존재감은 유독 커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올해의 가요계는 걸그룹을 빼 놓고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선택받은 걸그룹
 
 블랙핑크

블랙핑크 ⓒ YG엔터테인먼트

 
지난 9월 정규 2집 < Born Pink >를 발표한 블랙핑크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걸그룹의 입지를 굳혔다. 빌보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고, 전 세계에서 유튜브 구독자가 가장 많은 아티스트 등의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방탄소년단 멤버들이 군입대를 확정한 지금, 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케이팝 그룹의 자리를 굳힐 가능성이 높다.

국내에서의 인기를 놓고 보면, 2022년은 단연 아이브의 해였다. 빌보드 매거진에서는 특집 기사에서 이들을 두고 "케이팝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끄는 새로운 걸그룹"이라고 소개했다. 올해 발표한 'LOVE DIVE', 'After Like'가 연이어 음원 차트를 지배했다. 장원영과 안유진 등 스타성 있는 멤버들의 존재감, 그리고 이성에 대한 구애 대신 나르시시즘을 다룬 콘셉트가 조화를 이뤘다.

인기 멤버 서수진의 학교 폭력 논란과 탈퇴 후, 위기론 가운데에 컴백한 (여자)아이들은 'TOMBOY'로 흥행 홈런을 쳤다. 팝 펑크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이 곡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미친 O'이라 자처했고, 당당하게 'F Word'를 사용하기도 했다. "Yeah, I'm fu- tomboy"는 단연 올해 케이팝에서 가장 인상적인 가사였다. 대중은 이들의 당당한 모습에 화답했고, 올해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둔 곡이 탄생했다. 팀의 리더이자 래퍼, 프로듀서인 전소연의 존재감이 가장 극대화된 순간이기도 했다. 지난 10월 17일 발표한 신곡 'Nxde'에서도 직설적인 기조를 그대로 이어 나간다.

"야한 작품을 기대하셨다면 그딴 건 없어요."
- 'Nxde' 중, (여자)아이들


여름에는 새로운 복병 뉴진스가 등장했다. 2000년대 후반에 태어난 멤버들로 구성된 이 팀은, 이전까지의 걸그룹들과 단절된,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니크한 아이돌 그룹의 콘셉트를 기획한 민희진 어도어 대표의 첫 걸그룹으로도 관심을 받았다. 프로듀서 250이 주조한 음악은 1990년대 알앤비의 장르적 문법을 유지하면서, 10대의 사랑과 호기심을 노래했다. 최근 신곡 'Antifragile'을 발표한 르세라핌 역시 강한 여성상을 내세우면서 높은 호응을 받고 있다. 각자의 개성을 지닌 걸그룹들이 대중과 음악 마니아의 찬사를 나란히 받았다. '2022년은 OO 걸그룹의 해였다'라고 말해도 어색하지 않았다. 전무후무한 걸그룹의 해였다.

보이 그룹은 여성 팬덤이 많고, 걸그룹은 남성 팬덤이 많다는 것 역시 오해다. 남성 팬덤의 규모도 크지만, 아이브나 뉴진스의 경우 오히려 여성이 더 많은 음반을 구매한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의 걸그룹들이 이성애 이외의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이러한 흐름과도 관련이 깊다. 

전에 없던 걸그룹 시대, 한편 보이그룹은?
 
'뉴진스' 뉴진스가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KSPODOME에서 열린 < 2022 더팩트 뮤직 어워즈(THE FACT MUSIC AWARDS) > 포토월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뉴진스' 뉴진스가 8일 오후 서울 송파구 KSPODOME에서 열린 < 2022 더팩트 뮤직 어워즈(THE FACT MUSIC AWARDS) > 포토월에서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 이정민

 
팬데믹의 시간을 지나, 3년 만에 오프라인 대학 축제가 돌아왔다. 대학 축제는 20대의 보편적인 취향이 반영되는 무대다. 올해를 상징하는 걸그룹들이 이 무대에 선 것 역시 놀랍지 않았다. 아이브와 (여자)아이들 모두 대학 축제 무대에 섰고, 뉴진스는 첫 축제 무대인 단국대 축제에서 거대한 현상을 확인했다. 한편, 대학 축제에서도 보이 그룹은 자취를 감췄다. 위너(2014년 데뷔)처럼 대중적인 히트곡을 여럿 보유하고 있는 팀을 제외하고, 보이 그룹은 전무했다. 젊은이들의 '떼창'을 만들어낼 수 있는 3, 4세대 보이 그룹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팝스타인 방탄소년단을 제외하면, 최근 몇 년 동안 보이그룹은 이렇다 할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케이팝이 글로벌 전략에 집중하는 동안, 케이팝 그룹과 대중의 괴리는 극심해졌다. 문화 소비자의 취향이 그 어느때보다 파편화된 지금, 예전과 같은 국민 히트곡이 다시 탄생하긴 어렵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걸그룹 중에 팬덤과 대중을 모두 관통한 사례가 많았다.

2020년 7월 멜론이 실시간 차트를 개편한 이후, 팬덤이 많은 보이 그룹의 '줄 세우기' 현상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현재 주요 음원 차트에서도 보이 그룹의 이름은 찾아볼 수 없다. 대중은 밀리언 셀러(100만 장)를 돌파한 NCT 127나 투모로우바이투게더, 스트레이 키즈의 노래를 듣지 않는다. 올해 음원 차트에서 큰 성과를 거둔 보이그룹이 전성기에서 내려온 빅뱅뿐이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걸그룹 뉴진스 아이브 여자 아이들 블랙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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