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1년에 개봉한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 JFK >는 1963년 실제 있었던 존 F.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사건을 짐 개리슨 검사(케빈 코스트너 분)의 시선에서 따라가는 영화다. 사상 초유의 미국 현직대통령 암살사건이었던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은 6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의혹을 남기고 있을 만큼 전 세계를 커다란 충격에 빠트렸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영화 < JFK > 외에도 많은 대중매체들을 통해 다뤄진 바 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이 발생한 지 16년의 시간이 지난 1979년 대한민국에서도 현직대통령이 암살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일어났다. 1979년 10월 26일 서울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전가옥에서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그의 수하들이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비롯한 6명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는 현재까지 대한민국 헌정사상 현직 국가원수가 살해된 유일한 사건으로 남아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정권이 여러 차례 바뀌고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숨 죽이고 있던 그날의 사건과 이야기들이 대중문화 속에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눈물> <바람난 가족> 등을 통해 독특한 시각과 연출감각을 뽐냈던 임상수 감독은 2005년 10.26 사건을 조금은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본 블랙코미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선보였다.
 
 <그때 그 사람들>은 10.26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블랙코미디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그때 그 사람들>은 10.26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적인 사건을 블랙코미디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 MK픽처스

 
여러 대중매체에서 다뤄진 10.26 사건

전두환 정부와 노태우 정부 시절까지는 감히 누구도 다루지 못했던 10.26사건은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지 3년째가 되던 1995년 드라마 <제4공화국>을 통해 본격적으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당시 박근형 배우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역을 맡아 엄청난 존재감을 보여줬다. 특히 차지철 경호실장(이대근 분)과 대립을 벌이다 그를 총으로 쏘기 전 "이 새끼, 너 건방져!!"라고 외쳤던 김재규의 대사는 한동안 크게 유행이 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SBS에서는 <코리아게이트>라는 비슷한 정치 드라마를 방영해 <제4공화국>과 시청률 경쟁을 벌였다. <용의 눈물>에서 정도전을 연기를 하며 유명해진 고 김흥기 배우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을, 독고영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연기했다. 하지만 <제4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 전문' 이창환 배우와 박근형 배우의 존재감을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실제로 32부작 예정이었던 <코리아게이트>는 20부작으로 조기 종영됐다).

<공화국> 시리즈의 정통성을 잇는 <제5공화국>에서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신마적을 연기했던 김형일이 김재규 역을 맡았다. 김형일은 실제 김재규와 흡사한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며 드라마 방영 전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고 성우 출신답게 뛰어난 발성과 톤으로 김재규 역할을 무난히 소화했다. 다만 경상도 억양이 섞인 높고 빠른 톤의 김재규 실제 목소리가 중후한 저음의 김형일과는 차이가 있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장르는 전혀 다르지만 2000년에 개봉했던 멜로영화 <동감>에도 10.26 사건이 등장했다. 1979년의 여대생 소은(김하늘 분)이 10.26 사태를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울음을 터트리는 장면이었다. 이를 본 소은의 아버지는 "괜찮아, 겁내지마, 전쟁 같은 건 안 나"라며 울고 있는 딸을 달랜다. 하지만 소은은 10.26 사건으로 인해 2000년의 지인(유지태 분)이 실존인물이라는 걸 알고 자신의 사랑이 이뤄지지 않을 것임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린 것이다.  

코로나19의 대유행이 막 시작될 무렵인 2020년 1월에 개봉했음에도 흥행에 성공했던 우민호 감독의 <남산의 부장들>에도 10.26 사건이 나온다. <남산의 부장들>에서는 이병헌이 연기한 김규평 중앙정보부장이 김재규를 모티브로 만든 인물이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영화가 끝난 후 전두환 합동수사본부장의 수사결과 발표와 김재규의 최후진술을 실제 사진과 내레이션을 통해 들려주며 관객들에게 진한 여운을 남겼다.

무거운 현대사를 블랙코미디로 연출한 작품
 
 <그때 그 사람들>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세계 관객들을 만나기도 했다.

<그때 그 사람들>은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돼 세계 관객들을 만나기도 했다. ⓒ MK픽처스

 
<그때 그 사람들>은 헌정사상 초유의 현직 대통령 살해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제작 당시부터 크게 화제가 됐다. 물론 <그때 그 사람들>은 199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서울의 달>에서 사기꾼 제비족 김홍식을 연기했던 한석규와 능글맞은 중년의 미술선생 역을 맡았던 백윤식이 11년 만에 재회한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게 배우들의 전작을 거론하며 추억 이야기나 하기엔 영화의 소재가 너무 무거웠다.

실제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녀인 박지만 EG 회장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법원에 <그때 그 사람들>의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상영금지 청구는 기각됐지만 부마민주항쟁 장면과 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자료화면이 삭제된 채로 상영됐다. 하지만 영화에서 김 부장(백윤식 분)이 대통령(송재호 분)에게 총을 쏘기 전, 그를 "다카키 마사오"라고 부르는 장면은 삭제 없이 그대로 상영됐다.

<그때 그 사람들>은 2005년 설연휴를 앞두고 개봉했지만 <말아톤>과 <공공의적2> 등에 밀려 전국 100만 관객을 갓 넘기며 흥행에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하지만 <그때 그 사람들>은 임상수 감독에게 2005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작품상과 디렉티스컷 어워즈 올해의 감독상을 안겼고 미국의 영화 평점 사이트 로튼 토마토에서도 신선도 점수 82%를 받는 등 국내외에서 잘 만든 영화로 인정 받았다.

<도둑들>과 <암살>의 최동훈 감독은 임상수 감독의 <눈물>에서 조연출을 맡으며 현장경험을 쌓았는데 최동훈 감독은 <그때 그 사람들>에도 군의관 역으로 카메오 출연했다. 참고로 <그때 그 사람들>과 최동훈 감독의 <타짜>는 출연배우가 상당히 겹친다. <타짜>에서 평경장을 연기한 백윤식을 비롯해 곽철용 역의 김응수, 박무석 역의 김상호, 호구 역의 권태원, 너구리 역의 조상건 등은 <그때 그 사람들>에서 전혀 다른 캐릭터로 출연했다.

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의 원톱으로 군림하던 한석규는 1999년 <텔 미 썸딩>을 시작으로 2002년 <이중간첩>, 2004년 <주홍글씨>가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하지만 한석규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평소 부드러운 이미지와 다른 거친 캐릭터를 연기하며 흥행성적과는 별개로 관객들로부터 '역시 한석규'라는 극찬을 받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린 대배우 윤여정
 
 윤여정 배우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윤여정 배우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는 역할을 했다. ⓒ MK픽처스

 
윤여정 배우는 대한민국에서 아카데미 영화제 연기상(2021년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유일한 배우다. 지금은 엄청난 아우라를 가진 대배우가 됐지만 윤여정 배우가 1980년대 이후 영화에 거의 출연하지 못하던 시기, 과감하게 그녀를 캐스팅한 인물이 바로 임상수 감독이었다. 실제로 윤여정 배우는 2003년 <바람난 가족>을 시작으로 <그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 <하녀> <돈의 맛> <나의 절친 악당들>까지 임상수 감독의 장편 영화에 모두 출연했다.

윤여정 배우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영화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철없는 엄마와 에필로그 내레이션을 담당했다. 영화 초반부엔 자신의 딸을 대통령과 이어 주려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 부장(한석규 분)에 의해 길거리에 내버려지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는 측은함과 조롱이 절반씩 섞인 묘한 말투로 그 엄청난 사건에 휘말렸던 '그때 그 사람들'의 말로를 관객들에게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때 그 사람들>에서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바로 록밴드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가 실제 10.26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 역으로 출연했다는 점이다. 영화에서는 대통령이 심수봉에게 일본 음악인 엔카를 불러 보라고 하는데 촬영 당시 김윤아는 스튜디오에서 따로 노래를 녹음하지 않고 현장에서 직접 라이브로 노래를 불렀다. <그때 그 사람들>에는 자우림 5집 수록곡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도 영화의 엔딩곡으로 쓰였다.

2021년 류승룡, 오나라 주연의 영화 <장르만 로맨스>를 연출했던 배우 겸 감독 조은지는 <그때 그 사람들>에서 스스로 '쿨한' 성격을 가졌다고 밝힌 가짜 대학생 조씨로 출연했다. 조씨는 대통령 시해 사건 후 심수봉과 함께 궁정동 안가에 격리되는데 그곳에서 심수봉과 술을 마시면서 일을 벌린 이들이 '머리가 나빠서' 자신들을 잊었을 거라 확신한다. 그리고 실제 그녀의 장담처럼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 그 누구도 격리된 두 여성을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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