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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일기 834화 '가을 어느날'편(1997년 11월 9일 방영)에서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백일장이 열리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전원일기 834화 "가을 어느날"편(1997년 11월 9일 방영)에서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백일장이 열리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 mbc on 방송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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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심여사(김혜자)는 은영(고두심)이 말못할 고민에 빠져있다며 용진(김용건)에게 알아보라고 한다. 무심결에 은영의 노트를 뒤져보니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가 적혀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며 은영의 뒤를 밟지만,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리는 백일장에서 은영을 발견한다. 오후 4시, 시상식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탈락의 고배를 마신 은영은 풀이 죽은채 벤치에 허탈하게 앉았다. 이때 은영의 옆으로 용진이 다가와 만년필을 건네며 격려한다. 

이 얘기는 오랫동안 전 국민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전원일기>의 834화 '가을 어느날'(1997년 11월 9일 방영)편에서 그려진 에피소드이다. 농촌의 일화를 소소하게 그려낸 이 드라마에서 은영은 주부백일장에 응모하기 위해 글쓰기에 여념이 없다.

이내 장면이 전환되고 지금의 마로니에공원을 그대로 옮긴 곳에 '주부백일장',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이 선명하게 찍힌 현수막이 나온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사실은 현장접수 이후 즉석에서 원고를 작성하는 모습, 당일 심사 후 바로 시상자를 가리는 방식 등이 지난 13일 마로니에 공원에서 그대로 재현됐다. 

'국내 최고(最古) 여성 백일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인 '마로니에여성백일장'이 그것이다. 올해로 40회째인 이 행사는 문화와 체육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1983년에 시작됐다. 인간의 나이로 치면 '불혹(不惑)'인데, 당일 접수와 즉석에서 심사 후 시상자를 가리는 무모함에도 불구하고 이날 행사는 빈틈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완숙했다.

매년 가을이면 어김없이 대학로에 있는 마로니에공원 일대에서 펼쳐졌는데, 코로나19가 터지면서부터는 사회적 거리두기 때문에 제한적으로 열려왔다. 그런데 올해는 3년 만에 대대적인 야외행사가 펼쳐졌다. 사전에 온라인을 통해 지방에 있는 참여자들을 접수 받았고, 당일 현장에는 이른 오전부터 오프라인 접수도 진행됐다. 총 535명의 참여자들은 오전 10시에 발표한 4개의 글제에 맞춰 오후 2시까지 글쓰기에 정신이 없었다. 

'숨바꼭질' '통조림' '의심' '액자'
 
지난 13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제40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에서는 현장에서 응시자들이 줄을 서서 참가를 신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지난 13일, 대학로 마로니에공원에서 열린 "제40회 마로니에여성백일장"에서는 현장에서 응시자들이 줄을 서서 참가를 신청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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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발표된 글제는 총 네 개다. 그동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열어 글제를 받았는데, 약 460여 개의 글제들 중에서 24개를 우선 선정했다. 시상식이 열리는 당일 오전 10시에 즉석 추첨을 통해서 4개의 글제를 발표했다. 마치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떠올리는 이 장면은 전국에서 모인 참여자들의 탄성을 자아냈으며, 자신이 준비한 방식대로 4시간 동안 원고를 채워나갔다.

청명한 가을하늘 아래 마로니에 공원의 의자에 앉아서 쓰는 이들도 있었고, 누구는 바닥에 그대로 앉아 원고를 채워나갔다. 오후 2시까지 마감을 해달라는 사회자의 부탁에 따라 일사천리로 진행된 백일장의 백미는 오후에 펼쳐진 시상식이다. 2시간 가량 시, 산문, 아동문학 등 세 분야에 따라 총 15명의 심사위원이 즉석에서 심사를 거쳤으며, 각 분야별 장원을 포함해 총 33명의 시상자들이 배출됐다. 

시상식 초반에는 의미있는 참여자에게 특별상을 수여한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초등학교 5학년에 재학 중인 12살 소녀와 함께 예순을 훌쩍 넘긴 한 응시자는 자신이 특별상을 탔다는 소식에 눈물을 쏟아냈다. 상을 수여하는 내내 어쩔줄 몰라하는 그에게 사회자가 소감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열흘 전에 백일장 소식을 들었어요. 저는 글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가 아니에요. 심지어 3일 전에 원고지 쓰는 법을 처음으로 배웠어요. 올해는 참가하는데 의의를 두고 내년이나 혹시나 죽기 전이라도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상을 받게 될 줄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서울뿐 아니라 전국에서 모인 500여 명의 참여자들의 사연은 각양각색이다. 나이, 직업 등을 불문하고 옷차림새와 스타일이 서로 달랐다.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여성'이라는 것뿐이다(장원으로 선정된 세 명은 방송작가, 문예창작과 재학생, 문학 동호회의 회원이었다). 평소 글쓰기에 관심이 있어 우연한 기회에 백일장에 참여하게 됐다는 취업준비생 김현지(23)씨는 이렇게 소감을 들려줬다. 

"영어교육이 전공이라 영문학을 많이 읽었어요. 문학 수업을 많이 듣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평소에 책읽기를 좋아해서 작가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었어요. 저도 언젠가는 글을 쓰는 일을 하게 될 것 같아요. 한 권의 책을 발간하는 것이 인생의 버킷리스트입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는 '마로니에여성백일장'은 수석문화재단, 동아제약, 동아ST의 공동 후원으로 진행된다. 특히, 후원사인 동아쏘시오그룹은 40년간 이 행사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것은 기업후원의 우수 사례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올해는 이를 기념해 감사패 증정식이 마련됐다.

이 행사는 오랜 역사 만큼 걸출한 여성 문학인을 발굴하며 한국문화의 저변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이날 시상식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박종관 위원장은 백일장을 찾은 참여자들에게 이렇게 소감을 전달하며 격려했다. 

"마지막까지 남아서 이름을 불리기를 희망하는 여러분 모두가 장원입니다. 문학을 가슴에 담는 일을 끝까지 잊지 말아 주세요. 가슴 속에 문학을 담는 것은 가슴 속에 별을 담는 것이니까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총 535명의 응시자들이 백일장에 참여했으며, 이중에서 33명의 수상자들이 선정됐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총 535명의 응시자들이 백일장에 참여했으며, 이중에서 33명의 수상자들이 선정됐다.
ⓒ 이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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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백일장이 종료된 후 마로니에공원에서 이 사업을 총괄하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대훈 문학지원부장을 만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_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백일장이다. 대학로에 위치한 마로니에의 이름은 이해가는데, '여성'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국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초기에는 순수 아마추어 문학애호가들 중 가정주부가 참여하는 주부백일장으로 운영했다. 이후 여성으로 명칭이 정해져서 지금은 여성이라면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대표적인 여성백일장으로 자리잡았다."

_ 현장에서 즉석에서 공개되는 글제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올해 글제의 선정과정이 궁금하다. 
"현장에서 글제를 공개하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기대감과 설레임을 주는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사전에 공개하면 미리 준비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 글 수준이 높아질 수는 있겠지만, 정해진 시간에 똑같은 조건으로 현장에서 직접 원고지에 써서 참여하는 취지가 바래질 수도 있다. 예년에 발표된 글제와 중복되지 않게 매년 공개모집 이벤트를 통해 글제 후보풀을 만들고 그중에 랜덤으로 24개를 정해서 현장에서 추첨하여 최종 4개가 결정된다."

_코로나19 이후 처음으로 재개되는 대규모 야외 프로그램이다. 그동안 온라인으로만 진행되던 방식에서 오프라인으로 확산되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 높을 듯하다. 올해만의 대표적인 특징은 무엇인가?
"지난 2년간 이례적으로 온라인 참여방식으로 진행됐다. 마로니에 공원의 가을 정취는 만끽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참여자들은 물리적 시·공간의 제약이 없어 엄청나게 늘어났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코로나19의 사회적거리두기가 해제되면서 오프라인에서 진행되어 그동안 현장에 참여하지 못했던 분들이 많은 관심과 문의를 주셨다. 사전 참가신청도 코로나 이전보다 대폭 늘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많은 분들이 모처럼 대학로에서 가을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올해는 40주년으로 야외무대에서 진행되는 공연과 특별강연에도 공을 들였다. 이밖에 지난 40년동안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사진전시도 준비했다."

태그:#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학, #마로니에 공원, #백일장, #전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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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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