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이 글에는 작품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영화 <호수의 이방인>(2016)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잘 알려져 있을 만큼 알랭 기로디 감독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호수와 남자, 단 두 가지의 소재만으로 우스우면서도 서늘한 공기가 감돌게 만드는 매력적인 이 영화는 어느 여름날 호숫가에서 펼쳐지는 남자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다. 처음에는 남녀의 사랑이야기로 풀어내고자 했으나 극을 이끌어 가는 두 인물이 모든 측면에서 동등한 위치에 놓이길 바라는 마음에 남자들의 이야기로 방향을 선회했다는 감독은 이 작품으로 칸 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 섹션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번 부산국제영화제의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거장 감독의 신작 또는 세계적으로 주목 받는 화제작 가운데 감독이나 배우가 영화를 직접 소개하고 관객과 만나는 섹션)에 선정된 <노바디즈 히어로>는 알랭 기로디 감독의 신작이자 베를린영화제 파노라마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테러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도시에 코미디적 웃음을 얹어 유머를 구현해 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전체적인 느낌이다. 이는 2010년 중후반을 시작으로 프랑스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의 테러 사건들과 무관하지 않다. 감독은 이 시기 이민자와 소수 민족을 향한 프랑스의 태도를 냉정하게 바라보며 희극적으로 표현해내고자 한다.

02.
영화는 한 남자가 길 건너편의 여성에게 다가가 돈을 지불하지 않고 사랑을 나누고 싶다고 말을 거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자신은 매춘과 관련한 일에 반대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뻔뻔하기만 하다. 남자의 이름은 메데릭(장 샤를르 클리셰 분). 혼자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소프트웨어 디자이너다. 여자는 남자의 접근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지만 제안을 받아들여 볼 만큼 그가 매력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 지역의 허름한 호텔에서 만나 관계를 갖는다. 이처럼 두 사람이 자연스러운 만남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이사도라(노에미 리보프스키 분)가 성매매를 해왔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날 이후에도 메데릭은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 주변을 맴돈다.

사건은 두 사람이 호텔에서 만나 처음 사랑을 나누는 시점에서 벌어진다. 켜져 있던 TV에서 두 사람이 머물고 있는 곳과 가까운 곳에서 테러가 일어났다는 속보가 흘러나온다. 테러리스트들의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격으로 많은 시민들이 다치고 도시가 혼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사랑을 나누던 도중에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두 사람이 (정확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에 집중하고 싶은 메데릭과 어서 자리를 피하고 싶은 이사도라) 놀라는 사이 이사도라의 남편 제라르(르노 루텐 분)가 호텔방으로 뛰쳐 들어와 그녀를 끌고 나가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메데릭은 자신의 아파트 주위를 맴돌고 있는 노숙자 셀림(일리스 카드리 분)을 만나게 되고 그를 테러리스트라 오해하면서 이야기는 점차 수렁으로 빠져들기 시작한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3.
앞서 조금은 긴 분량을 할애하여 영화의 초반부에서 그려지는 대강의 스토리 라인을 축약해 설명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이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두 가지 사건이 이후 작품의 중후반에서 확장되고 수렴되면서 극을 이끌어가는 커다란 축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메데릭과 이사도라가 관계를 이어나가는 과정에서 남편 제라르의 개입으로 일종의 삼각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남자가 집 앞에서 만난 셀림을 수상한 인물로 여기면서도 자신의 집 안에 들이며 그 관계가 지속성을 띠게 된다는 점이다.

이 모든 상황은 때에 따라 장소를 달리 하기도 하지만 주로 메데릭의 아파트에서 벌어진다. 그 과정에서 아파트의 다른 호수에 살고 있는 이웃들의 개입도 자연스럽게 함께하게 되는데 이는 영화가 투영하고자 하는 다양한 관념과 현실을 조금 더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앞서 이야기한 두 개의 축으로부터 파생되는 에피소드 각각이 갈등이나 모순, 차별과 폭력 등의 사회를 붕괴시킬 수 있을 정도의 관념들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메데릭이 살고 있는 아파트 공간은 하나의 사회 혹은 프랑스 사회를 축소시켜 놓은 자리라고 봐도 무관할 것이다.

04.
알랭 가로디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통해 냉철한 사회적 관찰을 극의 구조화된 세계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익살스러운 유머 코드에 있다. 이를 완성시키는 방법으로 차용하고 있는 방식은 모두 두 가지로, 그중 처음은 전복(顚覆)에 의한 권위의 약화다. 두 사람이 관계를 채 끝내기도 전에 헤어져야 하는 첫 만남의 마지막 순간에 남편을 따라 옷을 입고 나가는 여성과 여전히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이불로 다급히 자신의 몸을 가리는 남자의 모습은 전통적 관습의 연출에서는 분명히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여기에 돈을 지불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던져주는 돈을 오히려 받게 되는 메데릭의 입장은 자신이 되려 화대(花代) 받은 것과도 같은 상황이 되고 만다. 하루만 재워 달라던 셀림의 태도가 다음날 아침 급변하는 것도 이 지점에 속한다. 영화는 이러한 장면들을 통해 기존의 권위 체계를 일순 무너뜨리며 고정관념을 털어낸다. 인물의 밑바닥을 드러내며 사회와 매체가 울부짖는 인간의 고고함이 얼마나 얕은 것인지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그 다음은 양면성을 통해 드러내는 인물의 내면적 투영이다. 셀림이 잠깐 머물 수 있도록 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해 왔을 때 메데릭은 문을 열어주고 마른 옷까지 건네는 호의를 베풀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경계는 풀지 못한 채 경찰에 신고를 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테러리스트들의 몽타주와 셀림의 얼굴이 닮은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신의 집에도 그를 들여보내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코딩 기술을 활용해 이메일을 해킹하는 모습도 보인다.

아파트 공간 전체로 놓고 봐도 마찬가지다. 정치적인 입장에서는 그의 건물 체류에 대해 반대입장을 보이는가 하면 반대로 인도주의적 입장에서는 도와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직접 돕겠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일종이 아이러니이지만 말이다. 영화의 중반부를 지나며 거리의 부랑아들로부터 공격받은 셀릭을 돕는 이웃들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안전을 살피며 도움을 주고자 하지만 한편으로는 또 왜 자신들의 집 앞에서 자꾸 이런 일을 벌이느냐고 그들은 묻는다.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노바디즈 히어로>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5.
이 영화에는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꽤 많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완성된 장면이 등장하지는 '못' 하고 있다. 영화의 모든 섹스 장면은 외부의 사건으로부터 그 경계를 침범 당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이는 개인의 평화가 외부의 사건으로부터 충분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의 표상이기도 하다. 외부의 사건이 자신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지 않더라도 일상을 흔들 수 있을 정도로 영향을 받을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타인의 아픔과 사건, 사고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영화에서 가장 처음으로 나오는 메데릭과 이사도라의 섹스가 도시의 테러 속보로 흐지부지되고 마는 장면에 이 모든 의미가 가장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테러와 관련한 소재가 극의 중심에 놓여있는 만큼 폭력에 대한 물음도 자연스럽게 던져진다. 명목상으로는 자신들의 마약을 훔쳐갔다는 이유를 들지만 어쩐지 이방인에 대한 혐오가 담긴 듯한 셀림을 향한 부랑아 무리의 린치. 메데릭과 불륜을 저지르는 이사도라를 집으로 끌고 간 뒤에 집안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소리와 비명까지. 작품 전반을 아우르는 테러의 그림자와 함께 영화 곳곳에서 그려지는 폭력의 이미지들은 지키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묻고 있다.

물론 알랭 기로디 감독은 조금 더 높은 차원에서 극 중 모든 장면들이 하나의 커다란 농담과도 같다며 자신이 던지는 사회적 화두의 직접적인 영향권으로부터 한 발 떨어지려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간다. 그런 방법으로 쌓아 올린 과장되며 우스꽝스러운, 현실과 유사한 모습이지만 현실에서는 벌어지기 힘든 장면들의 연속은 때때로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을 전달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 대한 진짜 메시지는 우리 모두의 동기가 때때로 고고한 이상보다는 사소한 욕망에 의해 주입되고 좌우된다는 부분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06.
"희망이 사라진 거야. 세상이나 인생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고."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난 메데릭의 눈 앞에 꿈에서 봤던 장면과 같이 공포스러운 현실이 곧 그려진다. 꿈과 현실의 괴리가 사라진 것이다. 다만 그 거리가 가까워졌음에도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것은 현실이 꿈에 가까워졌기 때문이 아니라, 꿈이 현실에 가까운 쪽으로 뒤쳐졌기 때문이다. 더 이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세상에서 이상을 울부짖고 상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종차별이나 매춘을 포함해 작품에서 화두로 던져지는 문제들은 여전히 시끄럽고 앞으로의 예측을 하기 어렵지만 그 또한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이 사회의 현실적 문제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 영화가 말하는 바다.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노바디즈히어로 알랭기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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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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