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그를 싫어하는 이들은 '광인'이라고 불렀지만, 백성들은 그를 언제나 자신들의 편에 서줬던 '조선시대의 슈퍼히어로'로 기억했다. 박문수(1691-1756)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중적으로는 이른바 암행어사의 대명사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가 어사로서 활동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백성들의 억울한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부패한 관리들을 심판했던 호쾌한 활약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존경의 대상으로 회자되고 있다. 

그의 진가는 바로 고난을 자처하면서도 백성들을 위하여 기꺼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이라면 흔들리지않고 꿋꿋이 걸어갔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에 있을 것이다. 9월 28일 방송된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 23회는 '어사 박문수는 왜 미치광이로 불렸나' 편이 다루어졌다.
 
사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박문수는 '암행어사'였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박문수는 지방을 감찰하는 어사 임무를 맡은 것은 사실이지만 암행을 하지는 않았고 신분을 드러내놓고 활동했다. 당시 백성들 사이에서 강직했던 박문수의 인망은 매우 높았고, 이는 음지에서 활동하는 암행어사의 이미지와 맞물려 이후로도 민간에서 박문수가 백성을 돕는 영웅으로 각인되는 계기가 됐다.
 
박문수는 지방의 민심을 두루 살피고 백성들의 고충을 왕과 조정대신들에게 솔직하게 알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작 당대 조정에서는 박문수를 이단아에 미치광이로 취급하며 미움을 받아야 했다.

왕 앞에서도 거침 없었던 박문수

1728년 3월, 영남을 감찰하고 돌아온 박문수는 조정 회의도중 왕과 대신들 앞에서 돌연 전복 하나를 꺼낸다. 백성들이 고생해서 잡은 지역특산물인 전복을 강제로 싸게 사들이고 비싸게 되팔아 이윤을 남긴 양산 군수의 횡포를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비록 백성들의 고충을 대변하려는 의도였다고는 하지만, 박문수가 왕 앞에서 저지른 행동은 전제군주제이자 유교 사회인 조선에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불경한 짓이었다. 실제로 신하들은 박문수의 불경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국왕이었던 영조는 오히려 박문수를 감쌌다.
 
기록에 따르면 박문수는 건장한 풍채를 지녔으며, 고집이 세고 소신이 강하여 대신이나 심지어 왕 앞에서도 할 말은 하고야마는 유명한 '프로 직설러'였다. 그런데 박문수의 상사인 영조 역시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인 일화에서 보듯이, 가족이나 신하를 가리지 않고 냉정하고 예민하고 깐깐하기로 소문난 군주였다. 이처럼 서슬퍼런 영조가 드물게 신하에게 유독 너그럽고 관대한 모습을 보인 몇 안 되는 인물이 바로 박문수였다.
 
기록에 따르면 박문수와 영조는 여러 차례 뼈있는 '썰전'을 주고받았다. 박문수가 왕에게도 직언은 기본이고 과격한 말까지 불사하는 인물이었기에 가능했다. 어느날 영조가 박문수에게 "경은 성품이 좋으나 모자란 건 학문일 뿐이다. 나 역시 그러니 우리 서로 힘쓰자"며 칭찬인지 욕인지 모를 농담을 날린다.

이에 박문수는 "지금의 학문은 겉만 번지르르해서 하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신은 학문이 없어도 옛사람들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라고 간크게 받아친다. 국왕에게 말대꾸를 했다는 자체만으로도 목이 달아날 판인데, 하물며 상대는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던 영조였다. 하지만 영조는 웃으며 "경이 아니면 누구도 이런 말을 못 한다"고 오히려 박문수의 직언을 이해해줬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또 한번은 박문수가 자주 왕의 용안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행동이 불경하다고 한 신하에게 지적받은 일이 있었다. 그러자 박문수는 전혀 위축되지 않고 "아들인 신하가 아버지인 왕을 쳐다보는 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코 처박고 아부하지 말고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고 당당하게 응수했다.

영조는 이번에도 박문수를 처벌하지 않았다. 엄격한 왕정 관료사회에서 박문수같은 행동을 지속적으로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은 경우는 드물다. 그만큼 영조와 박문수 사이에 굳건한 신뢰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3살 차이였던 박문수와 영조는 사제지간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1724년 34세의 박문수는 당시 31세였던 세제 시절의 연잉군을 시강원에서 만나 교육을 맡게 됐다. 후사가 없었던 당시 국왕 경종은 동생인 연잉군을 후계자로 지명하며 세자가 아닌 세제가 됐다. 나이차이가 많지 않았던 연잉군과 박문수는 돈독한 우정을 나눴고, 연잉군은 "각자 힘써 서로 저버리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라며 박문수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한 지 4년 뒤, '이인좌의 난'이 발발한다. 영조의 즉위 정당성을 부정한 반대당파인 소론 세력이 이인좌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 소론은 영조가 경종을 고의로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경종 독살설'을 반란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이는 영조의 재위 내내 계속된 정통성 콤플렉스를 건드린 것이었다.
 
위기의 영조를 도와 반란군 진압에 앞장선 인물이 바로 박문수였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열이었음에도 당파를 떠나 영조를 지키는 데 앞장섰다. 박문수는 당시 병조판서였던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해 반란군 진압에 전공을 세웠다. 이런 박문수에게 영조의 신뢰가 더욱 두터워졌음은 물론이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박문수는 난이 평정된 이후에 다시 영남 지역에 투입되어 민심수습에 앞장섰다. 반란에 가담했던 영남에서는 벌을 받을까 두려워 많은 백성들이 도주하며 여러 고을은 텅 비고 민심이 흉흉해진 상태였다. 놀랍게도 박문수는 호위병도 없이 혼자서 돌아다니며 민심을 탐방하는 파격 행보를 보였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주변의 만류에도 박문수는 "이는 위태로움과 의심을 진정시켜 편안히 하는 길이 아니다. 비록 뜻밖의 근심이 있을지라도 어찌 나라를 위하여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가?"라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박문수의 노력 덕분에 백성들은 하나둘씩 제자리로 돌아왔고 영남은 난의 후유증에서 벗어나 안정을 찾아갔다. 

"신하들 녹봉 깎아 백성 돕자" 깨어있었던 인물
 
박문수의 파격행보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728년 경상감사 재직 시절, 포항 앞바다에 대규모의 생필품이 떠내려온 것을 파악한 박문수는 북쪽 지방에 홍수가 났다는 것을 눈치채고 즉시 관아 창고에 비축된 곡식들을 함경도로 파견하도록 지시한다. 이는 왕의 허가없이 관아의 물품을 함부로 인출한 죄를 문책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박문수는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일이지만, 백성이 고초를 겪는 것은 큰 일이다. 당장 보내라"면서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박문수의 성품과 인생을 한 문장으로 함축한 어록이기도 하다. 절차에 얽매이지 않은 박문수의 과감한 결단 덕분에 많은 함경도 주민들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1731년에는 흉년이 계속되며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박문수는 바닷물에서 추출한 소금을 구워서 팔아 그 비용으로 백성들을 도울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당시 소금을 구워파는 건 지배층인 왕실 종친과 일부 관청이 독점한 특권이었기에, 박문수의 제안에 조정의 반응은 싸늘해졌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박문수는 조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금을 구워야하니 신을 차출하여 보내면 힘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겠습니다. 어느 곳인들 가지 못하겠습니까"라고 영조에게 호소했다. 양반이자 고위관료인 박문수가 노동자들처럼 직접 몸을 써서 소금을 굽는 일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박문수가 당대에 얼마나 깨어있고 실천적인 인물인지를 보여준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조정에서 왕실까지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박문수에 힘을 실어준 것은 역시 영조였다. 그는 "차후에도 반대하는 이가 있겠지만 사소한 일로 머뭇거리지 말고 일을 마치고 오라"며 박문수의 손을 들어줬다. 박문수는 명지도로 들어가 실제로 소금을 구웠고 이듬해 봄 무려 1만 8천 섬의 소금을 생산해내는 데 성공한다. 영조는 기뻐하며 "오직 박문수이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라며 극찬했다.

1732년에는 조선 각지에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며 전라도에서는 굶주린 유랑민이 사람의 시체를 구워서 먹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박문수는 구제대책의 일환으로 "신하들의 녹봉을 깎아서 백성을 돕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하는가 하면, 심각한 국가재난 사태에도 불구하고 기약없는 회의만 거듭하며 소극적인 조정의 분위기에 일침을 놓기도 했다. 

당시 박문수는 "마치 노예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으니 이렇게 하고도 어찌 나라다운 나라가 되겠습니까?"라고 영조와 대신들 앞에서 호통을 내질렀다. 조정의 대신들을 '노예'로 비하하는 과격한 발언은, 박문수를 줄곧 비호하던 영조조차도 "영성군(박문수)의 말은 지나쳤다"며 엄하게 질책했을 정도였다.
 
노예 발언 이후 3일 뒤 박문수를 지목하며 "광란한 잠꼬대에다가 속되고 패려스러운 말이 뒤섞여 있었습니다"라고 질타하는 상소가 영조에게 올라온다. 박문수가 미치광이처럼 이야기했다며 벌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영조는 "박문수가 말은 거칠었지만 세태를 개탄한 것이니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지나치다"며 감쌌다.
 
실록에 따르면 영조는 훗날 "박문수를 사람들이 광인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홀로 광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늘날 연석에서 박문수가 없었다면 어찌 이런 말을 들을수가 있겠는가. 박문수는 직간을 하니 칭찬할 만한 일이다"라고 박문수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다. 또다른 기록에는 "백성으로 하여금 국가가 있음을 알게하는 사람은 경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박문수는 이후로도 영조의 신임속에 여러 요직을 거쳐 호조판서(현재의 기획재정부 장관)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박문수는 조선의 오랜 사회적 폐단을 고치기 위하여 세금 제도를 개혁할 것을 추진했다. 백성들에게만 징수하던 군포(군역을 대체하는 옷감, 1년에 2필씩 국가에 제출하는 것)을 양반들도 공평하게 부담해야 한다는 것.
 
양반에게 군포를 징수하자는 논의는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지만 기득권의 격렬한 반대로 번번이 무산되곤 했다. 1750년 박문수는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호전'제도의 도입을 주장하며 집집마다 재산에 맞춰 세금을 부과할 것을 제안한다. 어떤 양반들은 "백성과 똑같이 세금을 걷으면 원망과 저주가 있을 것"이라는 폭언을 내뱉으며 저항했고 박문수의 제안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영조는 호전론 대신 균역법을 시행하며 군포를 1필로 감면해주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비록 박문수가 원하던 만큼은 아니었지만, 균역법의 취지가 잘못된 제도를 바로잡자는 것이었고, 이는 백성들을 위하던 박문수의 진심이 반영되었기에 빛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또한 박문수는 균역법으로 부족해진 세수를 충당하기 위하여 박문수는 이번에는 어장과 염전에서 세금을 걷는 어염세를 제안하기도 했다. 왕실의 소유인 염전 수입을 국가 운영에 쓰자는 제안이었다. 왕실의 수장인 영조로서는 불쾌하고 난처할 수밖에 없는 주장이었음에도 박문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양반과 백성들을 위하여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영조의 결단 덕분이었다.
 
평생을 조정의 이단아로 불리면서도 백성을 위한 삶을 걸었던 박문수였지만 평생 여러 차례에 걸쳐 무고와 누명에 시달렸다. 말년인 1755년에는 영조의 통치와 정통성을 비난하며 반란을 선동한 정체불명의 괘서 때문에 조정이 발칵 뒤집히는 '나주 괘서사건'이 터진다. 당시 역모 주동자들을 심문한 결과, 놀랍게도 여기서 박문수의 이름도 거론된다.
 
훗날 무고로 밝혀졌지만, 박문수는 고령의 나이에 옥에 갇혀 국문을 받아야 했다. 영조는 애초에 박문수의 역모를 믿지 않았지만 고변이 이어지며 신하들의 처벌 요구가 빗발치자 영조도 어쩔 수 없었다. 옥에서 풀려난 이후 큰 충격에 상심했는지 박문수는 칩거하여 두문불출했고, 불과 반 년 뒤에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예순 다섯이었다.
 
영조는 박문수의 죽음에 애통해하며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였고,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아, 박문수가 이미 갔으니 누가 나의 마음을 알 것인가"라며 절절한 심경을 드러냈다. 평생의 지기이자 충성스러운 신하를 쓸쓸하게 떠나보내야 했던 영조의 회한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이처럼 박문수는 권세가들의 미움을 받으면서도, 누구보다 백성들을 위하여 앞장설수 있는 용기를 지닌 인물이었다. 평생 아웃사이더로 미치광이와 이단아 취급을 받으면서도 흔들림 없었던 그의 뚝심은, 후세에도 백성들의 편에 섰던 영원한 암행어사의 이미지로 기억되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오늘날도 국민들의 고통보다는 그저 자신들의 기득권과 진영의 이익을 대변하는 데만 매몰된 정치인들에게 박문수의 삶이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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