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히어로 집단 어벤저스에는 블랙 위도우와 윈터솔저, 팔콘, 호크아이, 스칼렛 위치처럼 솔로무비나 드라마가 늦게 나온 캐릭터도 있고 웡이나 발키리처럼 솔로무비 없이 은근슬쩍(?) 어벤저스 멤버가 된 캐릭터도 있다. 하지만 어벤저스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솔로무비 속에서 모두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최소 도시나 나라, 최대 행성이나 우주를 구했던 경험이 있고 그만큼 슈퍼 히어로로서의 자부심 또한 매우 높다.
사실 아무리 강한 캐릭터들이 모여 있다 해도 구심점 역할을 하는 리더가 없다면 그 팀은 오합지졸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벤저스는 그런 걱정을 하지 않는다. 어벤저스에는 불굴의 애국심과 정의감으로 동료들을 하나로 뭉치게 만드는 리더십을 갖춘 캡틴 아메리카가 있기 때문이다. 캡틴 아메리카라는 확실한 리더가 있기에 어벤저스 멤버들은 <어벤저스: 엔드게임>의 최고 명대사 "어벤저스, 어셈블"도 기꺼이 캡틴 아메리카에게 양보했다.
어벤저스의 영원한 리더로 활약할 거 같았던 스티브 로저스 역의 크리스 에반스는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끝으로 MCU에서 '명예졸업'했다. 하지만 크리스 에반스는 2011년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를 통해 스티브 로저스를 만나기 6년 전에 이미 또 다른 슈퍼히어로를 연기했던 적이 있다. 캡틴 아메리카와 달리 수다스럽고 대중들의 관심을 즐기는 '화끈한' 바람둥이 관종 히어로 조니 스톰을 연기했던 영화 <판타스틱4>였다.
▲ 2005년 버전 <판타스틱4>는 네 편의 <판타스틱4> 실사 영화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어벤저스 멤버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
2000년대 초반부터 조·단역으로 배우활동을 시작한 에반스는 2004년 킴 베이싱어와 제시카 비엘, 제이슨 스타뎀 등과 함께 <셀룰러>에 출연하며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에반스는 이듬해 마블 코믹스의 인기 시리즈를 실사영화로 만든 팀 스토리 감독의 <판타스틱4>에서 제시카 알바가 연기한 수잔 스톰의 동생이자 바람둥이 히어로 조니 스톰 역을 맡았다. 에반스가 본격적으로 히어로의 세계에 발을 들인 순간이었다.
1억 달러의 제작비로 만든 <판타스틱4>는 세계적으로 3억 3300만 달러의 준수한 흥행성적을 기록했고 에반스는 2년 후에 개봉한 속편 <판타스틱4: 실버서퍼의 위협>까지 출연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판타스틱4> 시리즈를 통해 인지도가 올라간 에반스는 2007년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내니 다이어리>, 2009년 다코타 패닝과 함께 <푸시>에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착실하게 필모그라피를 쌓았다.
그렇게 할리우드의 젊은 미남배우로 성장하던 에반스는 2011년 자신의 운명을 바꾼 영화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저>를 만나며 MCU의 세계관에 합류했다. 에반스는 3편의 <캡틴 아메리카> 솔로무비와 4편의 <어벤저스> 시리즈에 출연하면서 어벤저스의 리더로 맹활약했다. 특히 2014년에 개봉했던 <캡틴 아메리카: 윈터솔저>는 액션과 히어로 무비, 정치스릴러를 절묘하게 뒤섞은 MCU의 '걸작'으로 평가 받고 있다.
에반스는 스티브 로저스로 활약하던 기간에도 <불량변호사>와 <아이스맨> <타임 투 러브>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캡틴 아메리카의 강렬한 이미지 때문에 대부분의 작품을 성공으로 연결시키지 못했다. 그중에는 에반스가 열차 꼬리칸의 리더 커티스를 연기하며 열연을 펼쳤고 2013년 개봉해 국내에서 930만 관객을 동원했던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도 있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2019년 <엔드게임>을 끝으로 캡틴 아메리카라는 큰 명예이자 부담을 내려 놓은 에반스는 같은 해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나이브스 아웃>에 출연해 3억 달러 흥행을 견인했다. 2021년까지 코로나19 대유행 때문에 활동이 잠시 뜸했던 에반스는 올해 <버즈 라이트이어>에서 라이트이어의 목소리 연기를 했고 넷플릭스 영화 <그레이맨>에서는 소시오패스 빌런 로이드 핸슨 역을 맡으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개봉 10년 후 최악의 리부트작 덕에 재평가
▲ <판타스틱4>의 수다쟁이 영웅 크리스 에반스는 6년 후 세상에서 가장 진중한 히어로 캡틴 아메리카로 재탄생했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1961년 마블 코믹스에 최초로 등장한 <판타스틱4>는 국내 인지도는 썩 높지 않지만 마블 세계관에서는 매우 인기가 높은 시리즈 중 하나다. <판타스틱4>는 지난 1994년 처음 실사영화로 제작됐는데 당시 15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드는 바람에 할리우드 영화라고 부르기 민망한 퀄리티의 영화가 탄생했다. 따라서 <판타스틱4> 실사영화의 시작은 20세기 폭스가 판권을 얻어 만든 2005년이라고 여기는 관객들이 대다수다.
이미 <엑스맨>이라는 집단히어로 영화를 성공시켰던 20세기 폭스는 <판타스틱4> 역시 새로운 인기 프랜차이즈 시리즈로 만들려 했다. 캐스팅 역시 스타 배우들보다는 크리스 에반스를 비롯해 제시카 알바, 이안 크루퍼드 등 원작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배우들로 채워 넣었다. 하지만 두 편의 <판타스틱4>는 6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했음에도 끝내 3편이 제작되지 못했고 2015년에 개봉한 리부트작을 끝으로 판권이 다시 마블로 넘어갔다.
<판타스틱4>의 판권을 회수한 마블은 2024년 11월 개봉을 목표로 새로운 <판타스틱4>를 만들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당초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만들었던 존 왓츠 감독이 <판타스틱4>를 연출할 거라는 뉴스가 있었지만 왓츠 감독은 지난 4월 히어로 영화 연출은 쉬고 싶다는 이유로 <판타스틱4>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현재는 헨리 카빌과 아만다 사이프리드 등이 'MCU판 <판타스틱4>'의 캐스팅 물망에 오르내리고 있다.
우주실험 도중 당한 사고로 <판타스틱4>의 멤버들은 한 가지씩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지만 주인공 일행과 함께 우주폭풍에 휩싸인 빌런 닥터 둠(줄리안 맥마혼 분)의 힘은 주인공 한 명, 한 명보다 더 강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집단 히어로 영화들처럼 <판타스틱4> 역시 4명의 주인공이 멋지게 힘을 합쳐 빌런을 무찌른다. 네 주인공이 각자의 능력을 이용해 닥터 둠에게 맞서는 장면은 <판타스틱4>의 가장 큰 볼거리다.
<판타스틱4>는 미국의 영화 리뷰 사이트 로튼 토마토의 신선도 27%, 관객점수 45%가 말해주듯 개봉 당시 썩 좋은 평가를 받았던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2015년에 공개된 <판타스틱4> 리부트가 로튼 토마토 신선도 9%, 관객점수 18%라는 턱없이 낮은 점수를 받으면서 '2005년 버전은 그나마 오락영화로서 나쁘지 않았다'며 관객들로부터 재평가되기도 했다. 그만큼 2015년 버전의 완성도가 끔찍했다는 뜻이다.
'MCU 아버지' 스탠 리, 우편배달부로 변신
▲ 온몸이 금속으로 된 강력한 빌런 닥터 둠은 판타스틱4의 기발한 작전에 그대로 굳어 버린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2004년 세계적인 모델 지젤 번천이 출연했고 릭 베송 감독이 제작한 영화 <택시: 더 맥시멈>을 연출하며 주목받은 팀 스토리 감독은 2005년과 2007년 두 편의 <판타스틱4> 시리즈를 모두 만들었다. 2014년과 2016년 아이스 큐브와 케빈 하트 주연의 액션 코미디 영화 <라이드 어롱 1, 2>를 만든 스토리 감독은 작년 실사와 애니메이션이 합쳐진 하이브리드 영화 <톰과 제리>를 연출했다.
성형외과 의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납턱>에서 크리스찬 트로이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던 배우 줄리안 맥마혼은 <판타스틱4>에서 우주폭풍에 노출돼 금속인간이 되는 닥터 둠을 연기했다. 닥터 둠은 휴먼 토치의 초신성 공격을 맞고도 거의 충격을 받지 않지만 싱(마이클 치클리스 분)이 쏜 소화전 물줄기에 맞아 그대로 몸이 굳어 버린다. 코믹스에서 상당한 카리스마와 능력치를 자랑하는 것과 비교하면 영화에서는 다소 허무한 결말을 맞는다.
생전 자신이 탄생시킨 마블 코믹스 원작 영화에 단골로 카메오 출연했던 것으로 유명했던 '마블의 아버지' 고 스탠 리는 <판타스틱4>에도 어김 없이 얼굴을 드러냈다. 4명의 주인공이 처음 능력을 얻어 사람들을 구하고 유명인사가 된 후 회사로 돌아온 리드 리처즈(이안 그루퍼드 분)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우편배달부 역할이었다(스탠 리 역시 졸작으로 평가 받은 2015년 버전 <판타스틱4>에는 출연하지 않는 '선견지명'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