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주상영관 노릇을 했던 어울마당의 모습.
박장식
4~5년 전 블랙리스트와 검열 얘길 꺼낸 이유가 있다. 지자체의 지원을 받거나 방송국이 개최하는 국제영화제에서 벌어졌거나 벌어지는 일련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때문이다. 벌써 국제영화제가 2개나 폐지 수순을 밟고 있다.
25일 강원도, 평창군, 후원 등 전체 예산 22억 원 규모로 알려진 평창국제평화영화제가 돌연 폐지를 알렸다. 이날 영화제 측은 "예산 지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지자체의 현실적인 문제로 더 이상 영화제를 유지할 수 없게 됐다. 마지막까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날 <강원도민일보>도 "영화제 측은 도의 긴축재정과 예산 축소 가능성 등에 대비해 다양한 선택지와 대안을 마련해 왔으나 아예 사라지는 결과를 맞았다"고 전했다.
지난 6월 4회를 맞은 평창국제평화영화제는 여타 영화제와 같이 코로나19 사회적 거리두기가 완화된 상황에서 무탈하게 행사를 치러냈다. 6.2 지방선거를 전후해 영화계 안팎에서 지자체장 교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을 제외하고 예상되는 폐지 요인은 없었다는 얘기다.
평창국제평화영화제의 이사장은 배우 문성근이다. 대표적인 지난 보수 정부 블랙리스트 피해자다. 이 같은 상황에서 들려온 급작스런 영화제 폐지 소식에 김진태 신임 강원지사의 과거 발언이 조명을 받고 있다. 2017년 1월 새누리당 의원 시절 태극기 집회에 참석한 김 지사의 발언은 이랬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가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종북좌파에게까지 국비 지원을 해야겠는가."
"박근혜 정부에서 순종북좌파 행위를 하는 그런 사람들한테 국비까지 지원해야 되겠느냐."
공교롭게도 4회 평창국제평화영화제 개막일이기도 했던 지난 6월 23일, 당선자 신분이던 김 지사는 기자회견을 열고 전임 최문순 전 강원시장이 지원해왔던 각종 보조금 사업의 전면 재검토를 천명했다.
당시 김 지사는 영화제 개막식 불참을 시사한 뒤 강금실 전 법무부장관이 공동위원장을 맡은 평창평화포럼과 함께 "취임 후 도지사 권한 내에서 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겠다"며 사실상 예산 중단을 암시한 바 있다.
강릉국제영화제 폐지와 EIDF의 검열
오랫동안 부산국제영화제를 이끌어왔던 김동호 이사장이 수장이던 강릉국제영화제도 지난 7월 26일 홈폐이지 공지를 통해 3년 만에 폐지를 알렸다. 오는 11월 4회 영화제 개최를 앞뒀던 강릉국제영화제는 "지난 6월 28일 김홍규 강릉시장 당선자가 김동호 이사장에게 강압적으로 영화제 폐지를 통보한 데 따른 것"이라며 "강릉시의 예산 및 행정 지원 없이는 영화제 개최가 불가능하다"며 유감을 표했다.
"영화제 개최를 불과 4개월 앞둔 시점에서 영화제를 폐지하는 것은 올해 영화제 참석을 확정한 거장 감독들과 해외 주요 영화제 관계자, 그리고 국내외 영화인들에게 강릉뿐만 아니라 한국 영화계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일로써, 지극히 유감스럽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후보 시절 국민의힘 소속이자 권성동 원내대표의 친구임을 강조해 온 김홍규 시장은 선거 공약으로 영화제를 폐지하고 대신 그 예산을 지역 문화예술인 지원에 쓰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다수 시민과 지역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영화제 무용론"을 제기한다는 것이 영화제 폐지의 근거였다.
결국 영화제 예산은 '출산 장려책'에 쓰일 전망이다. 김 시장은 영화제 폐지가 공식화되기 전인 지난 7월 17일 취재진과 만나 "올해 강릉국제영화제 관련 예산 30억 원 중 27억 원가량을 회수해 출산 장려 정책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에 사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지난 17일 영화계 단체들은 공동 성명을 내고 "국제영화제는 지자체장의 전유물이 아니다"라며 "우리 영화인들은 한국영화계와 한국의 신뢰를 실추시키는 일부 지자체장의 반문화적‧근시안적 행태를 성토하며 강력한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 정치권의 오판을 더이상은 좌시하지 않을 것임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바"라고 경고한 바 있다.
폐지는 아니지만 다수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은 작품을 석연치 않은 이유로 '방송불가' 판정을 내린 영화제도 등장했다.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EIDF)다. 22회 EIDF는 최근 단편 섹션에 출품돼 극장 상영 및 EBS 방영이 예정됐던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금정굴 이야기>의 28일 방영을 돌연 취소했다.
25일 EBS에 따르면, EBS 심의실 자체 심의 결과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과 제14조(객관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1950년 경기도 고양시에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금정굴 이야기>는 앞서 개최된 올해 광주독립영화제,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 등에 별탈 없이 초청·상영된 바 있다.
EBS는 이명박 정부 시절이던 2012년 < 지식채널 e > '구럼비'편 '방송불가' 결정을 굽히지 않아 '정치적 개입' 논란을 자처한 바 있다. 10년 만에 재현된 '방송불가' 결정으로 영화계 안팎의 반발이 예상되는 가운데 전승일 감독은 EBS 결정에 불북, 24일 오후부터 방송불가 철회 연대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해당 연대 서명 운동은 반나절 만에 300명이 넘는 개인과 단체가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려가 현실로
▲평창국제평화영화제 방은진 집행위원장.평창국제평화영화제
8년 전이던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는 '<다이빙벨> 사태'로 홍역을 앓았다. 이후 국정농단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면서 당시 박근혜 청와대가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충격을 더했다. 블랙리스트 사태의 촉발 중 하나가 바로 이 <다이빙벨> 사태다.
지난 5월 법원은 이른바 '블랙리스트 소송'에서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독립영화 제작·배급사인 시네마달이 박근혜 정부가 작성한 문화예술계 지원배제 명단인 '블랙리스트'에 올라 손해를 입었다며 국가와 영화진흥위원회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법원은 원고 일부 승소 취지로 "피고들이 공동으로 원고에게 8000여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시네마달은 <다이빙벨>의 배급사다. 블랙리스트 피해를 입은 독립영화 제작·배급사가 승소 판결을 이끌어내까지 무려 8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리고 윤석열 정권이 집권한 2022년, 국제영화제들이 폐지 운명에 처했다. 또 검열의 망령이 부활하는 조짐까지 감지된다.
블랙리스트 피해자들이 여전히 트라우마 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나온 이러한 일련의 조짐은 우려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영화제가, 문화예술이 또 다시 정치에 휘둘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헌트>의 관객들이 '블랙리스트 부부' 운운하는 농담이 농담이 아닌 상황이 펼쳐질지 모를 일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8
영화 칼럼니스트 및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전 FLIM2.0,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