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한명회(韓明澮, 1415-1487)는 한국사에서 이른바 권신의 대명사로 꼽힌다. 1453년 세조를 도와 조선 시대 최대의 쿠데타인 계유정난을 성공시킨 주역으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의 반열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인 동시에, 드라마틱한 몰락과 사후의 부관참시에 이르는 비참한 결말로 권력의 허망함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회자된다.

8월 17일 방송된 tvN STORY 오리지널 역사 예능 <벌거벗은 한국사>에서는 '킹메이커 한명회는 어떻게 조선의 왕을 바꿨나'라는 주제로 최태성 강사와 함께하는 히스토리 투어가 진행됐다.
 
한명회의 인물됨을 요약하는 표현으로 "문장과 도덕은 그대만 못하나, 사업을 경륜함에 이르러는 어찌 크게 뒤지겠는가"(한명회 선생 신도비명)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경륜이란 일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공부하는 머리는 없을지 몰라도 현실에서의 지략과 처세술, 실행력은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명회는 젊은 시절 과거시험에서 매번 낙방했지만, 쿠데타라는 수단을 기획하고 운용하며 누구보다 큰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게 된다. 송웅섭 총신대 한국사 교수는 "공부 빼고는 다 잘했던 인물"이라고 한명회를 평가했다.

한명회는 38세가 되어서야 음서제를 통하여 얻은 첫 관직은 종9품 말단인 개성 경덕궁의 궁지기였다. 별볼일 없는 관직생활을 이어가며 저물어갈 운명이던 한명회에게 어느날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다. 바로 왕실의 종친인 수양대군과의 만남이었다.
 
궁지에 몰린 수양대군과 한명회의 만남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세종대왕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 단종의 숙부였던 수양대군은 한명회를 만날 무렵, 세종의 남은 아들 중 최연장자로 종친을 대표하는 어른의 위치에 있었다. 정치적 야망이 컸던 수양대군은 어린 단종을 보필하는 대신들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특히 좌의정 김종서는 세종과 문종의 고명대신으로 단종 시기에 '황표정사'로 불리우는 막강한 권력을 누리며 수양대군과 대척점에 놓여있었다.
 
설상가상 김종서는 왕실종친 중 단종과 고명대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안평대군과 손을 잡으며, 수양대군은 정치적인 입지가 더욱 좁아진다. 궁지에 몰린 수양대군은 자신에게 길을 알려줄 책사를 찾는 과정에서 한명회를 만나게 된 것.
 
한명회는 수양대군과 인연이 있던 친구 권람을 통하여 자신을 소개해줄 것을 제안했다. 자신의 외롭고 약한 형세를 호소하며 조언을 구하는 수양대군에게 한명회는 이렇게 답했다.
 
"종실의 후손으로서 사직을 위하여 난적을 토벌하는 만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하니 절대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사실상 역모를 제안한 것이었고, 한명회의 이 한 마디는 훗날 조선의 역사를 바꾸게 된다. 수양대군은 그 말을 듣고 한참 고민하다가 "경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내가 마음을 정하였다"고 답했다.
 
전문가들은 이미 수양대군이 스스로 역모에 대한 결심을 굳힌 상황에서, 한명회의 대답이 명분을 굳히고 확신을 갖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책사가 되어 본격적인 역모 계획을 진두지휘하게 된다.
 
운명의 날인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직접 병력을 이끌고 한밤중에 김종서의 집을 찾아간다. 수양대군은 가짜 편지를 이유로 김종서를 끌어내어 암살하고 곧장 궁궐로 쳐들아가 단종을 만난다. 궁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역모를 꾀했다고 보고하고 13세의 단종은 두려움에 떨며 "삼촌,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한다.
 
한편 그 시간, 대신들은 긴급하게 궁으로 소집된다. 한명회가 준비한 살생부에 따라, 김종서와 안평대군의 편에 섰던 대신들은 그 자리에서 모조리 학살당했다. 살생부는 죽이고 살릴 사람의 명단만이 아니라 제거방법에 대한 시나리오까지 구체적으로 기획된 것으로 알려졌다. 살생부에 이름을 올렸으나 당시 궁에 오지 못했던 대신들은 병사들을 자택으로 보내 끝까지 추적하여 학살했다.
 
불과 1년 전 만해도 궁지기에 불과했던 한명회의 손아귀에서 수많은 조정대신들이 비명횡사하는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1453년의 이 사건을 계유정난(癸酉靖難), 김종서와 안평대군이 일으킨 난을 수양대군이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했다는 의미로 기록했다. 당시의 사서는 모두 수양대군측의 관점에서만 기록된 것이다.
 
계유정난의 일등공신이 된 한명회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거사에 가담한 43인을 공신으로 책봉했다. 한명회도 당연히 일등공신으로 책봉됐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정난의 일은 한명회가 다했고, 나는 한 일이 없다"고 할 만큼 정난의 실질적인 설계자로서 한명회의 공을 높이 평가했다.
 
정난 2년 후,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선양받고 조선 7대왕 세조로 등극한다. 하지만 정통성 없는 쿠데타로 집권한 세조는 오래가지 않아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게 된다. 단종 복위 운동을 추진한 신하들은 세조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했다.
 
단종 복위 세력은 명나라 사신의 연회장에서 호위무사를 포섭하여 세조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한명회가 돌연 연회장이 좁고 무더우니 칼을 든 무사를 들이지 말 것을 제안했다. 눈치가 빨랐던 한명회는 당시 호위무사 명단에 세조에 반대하는 세력 측의 인사가 포함된 데다 수상한 기색을 발견하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빠른 대처로 세조의 목숨을 구한 것.
 
거사가 불발로 끝난 후, 계획이 누설된 데 불안감을 느낀 김질의 밀고로 단종 복위 세력은 모두 체포되었고 잔인한 고문 끝에 모두 처형된다. 이들이 바로 사육신(死六臣,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이다.
 
위기감을 느낀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세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아예 반란의 싹을 자르기 위하여 단종을 제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단종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이후 1457년 11월 7일, 17세의 나이로 세조의 지시에 의하여 유배지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정통성이 없었던 세조는 결국 유일하게 믿을 만한 측근인 공신세력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세조는 공신세력의 대표주자였던 한명회를 도체찰사로 임명하여 지방에서의 반란을 막을 것을 지시했다. 한명회는 14번이나 도체찰사를 지냈을 만큼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한명회를 두고 "경의 이목이 곧 나의 이목이다"라는 어록을 남겼다.
 
한명회는 이후로도 세조 치세에서 승승장구하며 최고위직인 삼정승(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두루 거쳤다. 당시 그의 권세를 두고 "천하가 한명회의 손 안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한명회의 욕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으며 자신의 셋째-넷째 딸을 각각 세조의 아들-손자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기에 이른다.
 
3대에 걸쳐 왕 만들어 최고 실권자로 군림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tvN STORY <벌거벗은 한국사>의 한 장면. ⓒ tvN STORY

 
1468년 한명회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세조가 사망했다. 한명회의 사위이던 예종이 그 뒤를 이으며 한명회는 '왕의 장인'이 되었지만 약 15개월 만에 예종까지 급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한명회에게는 위기였지만 세조의 손자이자 자신의 넷째 딸과 결혼한 또다른 사위인 성종을 후원하여 왕위에 옹립하며 다시 한번 킹메이커다운 면모를 드러낸다.
 
성종 옹립 당시 후계자 결정권을 지닌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어린 성종을 후계자로 선택한 데는 한명회의 비중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게 분석이다. 장인이 한명회이기에 나이 어린 국왕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결과였다. 그렇게 한명회는 3대에 걸쳐 왕을 만들어내며 최고의 실권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권력의 화신 한명회에게도 몰락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성종이 성년이 되면서 정희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물러날 의사를 내비쳤고, 자신의 권력이 약해질 것을 우려한 한명회가 이를 반대하면서 사위 성종과 갈등을 빚게 된다.

성종실록에 따르면 성종은 한명회의 발언에 대하여 "이 말로서 살펴본다면 여러 정승들이 나를 믿지 못한 것이 없겠는가"라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내가 왕으로 통치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뜻이냐"라고 선을 넘는 한명회의 행동에 분노를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간 한명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있던 조정에서 그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치게 된다. 여론을 실감한 한명회는 성종을 찾아가 와병을 핑계로 스스로 사임을 청한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관직에서는 물러났지만 한명회의 위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정계 은퇴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한명회는 1481년 명나라 사신을 본인 소유의 압구정 정자에 초빙하여 연회를 주최하기 위하여 성종에게 용봉차일(국가나 왕실 행사 때 사용되는 고급천막)을 빌려줄 것을 청한다.
 
외국 사신에 대한 사적 접대에 국가기물까지 빌려달라는 한명회의 무개념 행태에 마음이 상한 성종은, 한명회의 부탁을 거절하고 연회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길테니 한명회도 참석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한명회는 아내가 아프다는 핑계로 왕의 명령을 거절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분노한 성종은 결국 한명회에게 내린 부원군의 직첩을 거두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사건은 한명회가 조선 정계의 주류이자 배후 실세에서 사실상 완전히 실각하게 된 결정적 장면으로 꼽힌다.
 
쓸쓸한 여생을 보내던 한명회는 압구정 사건 6년 후인 1487년, 73세의 나이로 병환으로 사망한다. 심지어 사후의 한명회에게는 더욱 참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성종의 아들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씨의 사건을 조사하던 중 한명회도 연루되어 있었다는 의혹이 드러났다. 당시 한명회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으나 복수심에 불탄 연산군은 한명회의 시신을 훼손하는 부관참시형을 내린다.
 
계유정난을 다룬 영화 <관상>에서는 관상가 김내경(송강호)의 시각에서 생전의 한명회(김의성)를 만나 그 관상을 거론하며 "천한 듯 하면서도 고귀하다. 하지만 끝이 좋지 않다. 당신 목이 잘릴 팔자다"라고 저주에 가까운 섬뜩한 예언을 내리고, 경악하는 한명회의 표정은 미래에 대한 복선으로 묘사된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서 세상을 호령했던 한명회는, 자신이 일궈낸 권력에 도취되어 점점 파멸의 길을 걸었고, 끝내는 사후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살아있을 때는 권세를 누렸으나 역사 속에서 한명회는 권신이자 난신, 역적에 가까운 인물로 냉엄한 평가를 받고 있다. 파란만장했던 한명회의 일생은 '권력은 잠깐이지만 역사는 영원하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좋은 반면교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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