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팡플레이 <안나> 한 장면.
쿠팡플레이
"항상 그랬어요. 난 마음먹은 대로 다 해요."
6부작이 오프닝마다 강조했던 안나의 비극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맞다. 촌스러운 방식이다. 6부작이 전반부를 통해 압축한 속도감 넘치는 전개는 '유튜브 요약 리뷰'란 비아냥을 부를만했다. 그 속도감을 위해 유미의 심리 구축은 물론 가족과의 관계 및 지인들을 통해 알 수 있는 배경들이 전부 휘발돼 있었다.
<안나>의 전반부. 이유미(수지)는 여러 곡절 끝에 수능 시험에 낙방한다. 사소한 거짓말이 점차 부풀려져 삼수 과정에서 가짜 대학생 행세까지 하게 된다.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그 거짓말에 스스로 도취되며 주변 환경도 의도치 않게 그 거짓말을 돕는다. 그 거짓말이 남자친구와의 미국 유학을 좌절시킨다.
직후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유미를 경제적인 나락에 떨어뜨린다. 그 과정에서 빠진 장면들 역시 이유미의 심리를 내밀하게 묘사하는 장면들이었다. 감독판은 그 거짓말이 이유미 개인의 탓이 아닌 중층적이고 복합적인 요인들의 집합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반면 6부작은 '이유미는 왜 악녀가 되었나'를 일차원적이고 단선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 이유미가 가난에도 경제적 지원에 지극정성이던 아버지와 청각장애인인 어머니를 신경 쓰던 장면들이 대부분 축소되거나 통편집됐다. 아버지가 빚을 남겼다거나 유미가 가장으로서 생계를 위해 고단하게 살면서도 사이버 대학 입학을 알아보는 장면들도 날아가 버렸다. 이런 통편집 장면은 셀 수 없이 많다. 심지어 꼬마 유미의 심리를 엿볼 수 있는 발레 무대 장면도 날아가 버렸다.
주조연들의 경우는 심각하다. 특히 이유미가 신분(학위증명서)을 훔치는 현주(정은채)나 스무살 하숙생 시절에 만나 끝까지 교류하는 신문사 기자 지원이 등장하는 장면이나 대사들이 대폭 축소되거나 삭제됐다. 그에 따라 이 둘을 통해 드러나는 계급 갈등이나 사회 비판 요소들, 그에 영향을 받는 이유미의 심리 역시 협소하게 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줄거리만 따라간 6부작과 비교해 작품 전체의 크기나 의도를 크게 훼손시키는 방향이 아닐 수 없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줄어든 2회 차 분량이 줄 수 있었던 무한한 정보와 심리 묘사가 전부 날아가 버린 셈이다. 극의 전체 톤도 180도 달라졌다. 대표적인 경우가 모그 감독이 공을 들인 음악이다. 6부작의 음악은 장면 내 분위기를 강화하는 단선적인 방향이라면 감독판은 종종 상황과 감정에 거리를 두게 하거나 아이러니한 감정까지 발생시키는 데 일조한다.
꼬마 유미가 '포커페이스'를 강조했던 미군 아내에게 배웠던 '작은별'이 테마처럼 활용되거나 유미가 라벨의 볼레로가 주요 시퀀스 전체를 아우르는 형식이 대표적이다. 회차 마다 시작이나 결말 장면이 달라지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 전편을 아우르는 음악의 분위기와 특정 곡의 활용 방식이 아예 바뀌거나 삭제됐다. 이러한 음악 활용의 변화는 이유미의 심리를 포함해 장면 연출의 의도마저 명백하게 뒤바꿔버렸다고 볼 수 있다.
컷과 컷이 바뀐 건 예사다. 감독판과 비교해 쿠팡 버전은 배수지의 정면 컷을 활용했다. 스타 배우의 얼굴을 강조하기 위한 일차원적인 편집 의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 이유미를 제외한 주조연들의 장면이나 대사들도 날아가 버렸다. 그 편집된 장면이 이유미의 심리나 그 배경을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장면도 꽤 된다.
대표적인 것이 고시원 총무 에피소드다. 이유미는 한식 뷔페를 데려가 교제를 제안하며 성추행을 하던 고시원 총무에게 단박에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 장면 속 이유미의 대사와 행동을 묘사하는 연출은 실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압축한다. 이 장면이 통으로 날라갔다.
"너, 이 새끼. 씨발 내가 만만하구나? 내가 뭘 오해하는데? 너 같은 새끼들이 법조인이 된다고? 여자가 먼저 계산하는 건, 혹시라도 너 같은 새끼들이 착각할까봐, 나중에 더러운 꼴 당할까봐야. 알아들었니?"
궁금한 쿠팡플레이의 의도
무엇보다 쿠팡플레이 측에게 들은 가장 충격적인 말은 "왜 모든 장면을 의도를 갖고 찍었느냐"였다. 의도가 없는 대사는 쓸모가 없고, 의도 없는 장면은 편집 과정에서 뺀다는 건 영상 문법의 기본이다. 작품을 평면적으로 그리고 싶지 않아서 다들 얼마나 노력하나. 연출자와 배우들은 모두 그 목적을 위해서 엄청나게 고생하는데 이들은 "왜 모든 장면을 의도를 갖고 찍었느냐"라고 말했다. 이들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 이주영 감독, 지난 11일 <씨네21> 인터뷰
쿠팡플레이 측의 오만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감독판과 6부작과의 비교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쿠팡플레이 측의 의도는 '더 짧고 굵게, 심리나 배경 따위 상관없이 이유미를 악녀로 만들어라'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감독에 따르면, 쿠팡플레이 측은 편집 회의 과정에서 "1~2부가 길다. 요즘 사람들은 유튜브를 10분 이상 안 본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런 의도를 숨기지 않고 편집 '갑질'까지 자행한 쿠팡플레이는 잃은 것이 너무 많아 보인다. <안나> 감독판은 여성 개인의 서사와 심리가 한국의 상류층 사회 묘사를 넘어 정치판의 이면까지 관통하는 탁월하고 유례없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었다. 감독판을 그대로 공개했더라면 더 많은 상찬과 이후 각종 시상식에서의 수상을 기대할 수 있었으리라. 쿠팡플레이 스스로 그런 밝은 미래를 걷어 차 버린 꼴이 된 셈이다.
더 의아한 것은 6부작으로 축소한 진짜 의도다. OTT 플랫폼은 시청자들의 시청 지속 시간이 점유율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넷플릭스마저 전체 공개에서 회차 별 공개를 고려하고 <기묘한 이야기> 4시즌 공개에서 일부 시행했을을 정도다. 감독판이 6부작이었다고 해도 쿠팡플레이 측이 나서서 8부작으로 늘려도 모자랄 판이란 얘기다.
연출 의도가 투자사나 제작사의 마음에 들지 않을 순 있다. 그러한 편집권 논쟁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공개된 감독판만 놓고 보면, 쿠팡플레이 측의 6부작 축소는 그 어떤 단일한 요인들론 설명이 힘들어 보인다.
'유튜브 요약 영상'을 추구했다손 치더라도 쿠팡플레이 측이 손해인 장사다. 그런 쿠팡플레이의 행태가 창작자인 감독이나 스태프들은 물론 감독판 시청을 위해 구독료를 다시 지불해야 했을 시청자들을 향한 모독인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을 것이고. 감독판을 시청할 또 다른 시청자들의 판단도 지켜봐야겠지만 지금까지의 평가와 크게 다르지 않을 듯 싶다. 이제 '저작인격권' 등을 주장하는 이주영 감독의 법적 대응 과정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