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사에 시달리면서도 감독의 꿈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년의 여성 감독 김지완은 어딘가 배우 이정은과 많이 닮아 있다.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오마주>의 한 장면이다.

실제로 연극 연출자로 데뷔했다가 마트 판매직, 일반 회사 등을 전전하며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고, 다시금 연기자로 돌아온 그는 16일 서울 삼청동 모처에서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그때 경험이 연기에 많은 도움이 됐다"며 영화 속 김지완과의 연결 고리를 언급했다. 

 
배우 이정은이 데뷔 이후 첫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오마주>는 1세대 여성 감독의 발자취를 쫓는 한 감독의 일상에 주목한다.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여판사>라는 영화를 연출한 홍은원 감독, 그리고 아기를 등에 업고 촬영 현장을 누비던 박남옥 감독 등 한국영화사에 실존한 여성 감독의 이야기를 담았다.  

해당작품은 <유리 정원> <마돈나> 등으로 여성 서사를 묵직하게 다뤄온 신수원 감독의 신작이다.
 
 영화 <오마주>에서 주연 맡은 배우 이정은.

영화 <오마주>에서 주연 맡은 배우 이정은. ⓒ 준필름

 
첫만남
 

"감독을 연기할 수 있는 여자 배우들이 많을 텐데 왜 내게 같이 하자고 하셨지?"

이정은은 이런 의문부터 들었다고 한다. 억척스러우면서도 주체적인 중년 캐릭터였거나, 때론 다소 괴랄한 캐릭터를 연기하며 보폭을 넓혀온 그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예전에 연극 연출할 때 관객 수를 걱정하던 것도 생각났고, 뭔가 뭉클했다"라고 첫 기억을 말했다.
 
"김지완이 놓지 않고 있는 꿈은 청춘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했다. 나이는 중년이지만 생각이나 외향적 느낌은 청년이길 원했다. 신수원 감독님의 경험도 있겠지만 저도 배우로 활동하고, 연극 연출 일을 하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가족도 환영하지 않는데 과연 내 꿈을 지속할 수 있을지 말이다. 그 생각을 반복하며 지내온 것 같다. 실제 삶에서 날 묶고 있는 건 엄마밖에 없는데 영화 속 지완은 남편도 있고, 아들도 있다. 책임감 때문에 과감한 결정은 못하는 거지. 대부분 그렇게 사시는 것 같다. 워킹맘, 워킹대디들이 다 그렇지. 과감하게 일을 때려칠 수 없는 사연이 있다. 이게 이 영화의 주요 소재고, 여기에 영화 하는 사람의 힘듦을 넣은 것이지."
 
이 영화를 만나기 전까지 이정은 또한 7, 80년대 활동했던 여러 여성 감독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동시에 저예산으로 어려운 여건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지금의 창작자에 대한 남다른 마음도 더욱 품게 됐다고. <기생충>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하다가도 주말 드라마에 출연하고, 그러다 <말임씨를 부탁해>나 <오마주> 같은 독립예술영화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그만의 작품관과 인간관 때문이었다.
 
"신수원 감독님에게 그런 얘길 했다. 이 직업을 택해서 한참 살다가 50대가 됐는데 점점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존재들에게 눈길이 간다고. 신 감독님 영화도 그런 것 같다고. 사실 블록버스터 영화 제안이 오면 곧이곧대로 제가 다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접점이 만들어지는 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저보다 그 역할을 잘할 수 있는 배우가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거든. 근데 <오마주>는 같이 만들어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소소한 서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저 역시 필요로 하는 서사가 그런 것이다."
 
이정은은 영화 속 대사 하나를 언급했다. 홍 감독의 자취를 쫓다가 만난 어느 편집 기사의 말이었다. "김지완에게 끝까지 살아남으라고 하잖나. 그건 최고가 되라는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하라는 말"이라며 이정은은 말을 이었다.
 
"뭔가 잊힌 것, 버려진 걸 찾는 게 제겐 뭉클하게 다가왔다. 저 또한 여러 작품을 했고 주목받고 각광받는 게 좋으면서도 대학로 언저리에서 올렸던 제 옛날 공연을 기억해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되게 뭉클하다. 그래서 작품 속 조연의 서사가 얇거나 입체적이지 않을 때 안타깝다. 좀 더 입체적이면 좋을 텐데. 개인적으론 제가 주연이기보단 조연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새로운 시도는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해서 종종 정중하게 감독님께 부탁드리는 때가 있다. <소년심판>도 그랬다. 제가 연기한 판사가 그냥 나쁜 사람으로 남기보단 뭔가 당위성이 있는 게 좋겠다고 했고, 작가님 또한 열어주셨다. 사실 이렇게 이뤄진 게 처음이긴 하다. 그간엔 서로 영역을 넘는 건가 싶어 시도조차 못했는데 생각을 정중히 전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오마주>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이정은.

영화 <오마주>에서 주연을 맡은 배우 이정은. ⓒ 준필름

 
깊은 내공
 

30년 넘게 연기하면서 왜 매너리즘이 없었겠나. 그에게 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은 무엇인지 물었다. 종종 후배들 또한 도움을 청하며 말을 걸어올 때 이정은은 무조건 버티라는 무책임한 말은 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어떤 일이건 부침은 있고, 일희일비하지 않는 게 그에게도 중요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정은은 스스로를 간이 작고 우스꽝스러운 사람이라 표현했다. 아마 멋쩍은 듯 한 말이겠지만 그만큼 자신을 들여다보는 내공이 느껴졌다. "소심하고 간이 작고 그런 보통 사람인 것 같은데 역할들을 하면서 이미지가 좋아져서 오히려 그게 고민"이라며 이정은은 소소함과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나름의 철학을 설파했다.
 
"사람들은 수면으로 올라와야 주목하고 인정하곤 한다. 수면 아래는 못 보는데 사실 너무 당연하지. 근데 눈을 주변으로 돌리면 분명 수면 아래에서 눈을 반짝이며 뭔가를 준비하고 해내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저 또한 그런 사람들을 보면 함께 어떻게 빛을 낼까 생각한다. 사실 (<우리들의 블루스>로) 제주 사투리를 배우러 다닐 때 매너리즘에 빠졌었다. 빨리 녹음해서 집에 와 연습할 생각만 했는데 큰 오류더라. 사람을 알지 못한 채 흉내만 내는 거였다. 조금 서툴게 발음하더라도 현지 분들과 맺는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겠다 싶더라. 그런 걸 배울 때마다 자극을 받는다. 어렸을 때 전 부모님이 너무 바빠서 혼자 다락방에서 인형 놓고 조물거리며 놀던 아이였다. 그게 연극으로 이어졌고, 영화에 출연하게 됐다. 그런 통로를 잘 찾아왔기에 온전하게 성장한 것 같다. 못 찾았다면 우울하고 용기 없는 아이가 됐을 것이다. 누군가에겐 제가 통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 생각도 한다."
 

올여름부터 이정은 새 드라마 작업에 들어간다. "지금까지 큰 후회 없이 했으니 앞으로도 성실하게 해나가겠다"며 그가 웃었다. 한동안은 다시 바빠질 그가 어떤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설까 사뭇 궁금해진다. 
이정은 오마주 신수원 여성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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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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