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영화 포스터

▲ <봄날> 영화 포스터 ⓒ 콘텐츠판다


호성(손현주 분)은 한때 잘나가는 건달이었지만, 8년을 복역하고 나서 가족과 조직에서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마주한 어머니 정님(손숙 분)은 건달들이 아들을 해칠까 매사 걱정이고 동생 종성(박혁권 분)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형을 한심하게 취급한다. 딸 은옥(박소진 분)은 뒤늦게 부모 노릇 행세하려는 아빠가 밉다. 아들 동혁(정지환 분) 역시 실없는 소리나 해대는 아빠가 이해가 안 된다. 

과거 목숨을 구해준 조직의 동생 석주(허정도 분)은 이제 호성을 챙겨주려 하질 않는다. 답답한 호성은 딸의 결혼식 비용과 아들의 보증금을 마련해줄 요량으로 부조금을 밑천 삼아 장례식장에서 도박판을 벌이는 기상천외한 비즈니스를 계획한다. 하지만, 오지랖 넓은 친구 양희(정석용 분)가 술주정을 부리는 바람에 일이 틀어진다.

한국의 전통 장례 문화는 슬픔을 초월한 잔치판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상가에 모여 왁자지껄 음식과 술을 나누며 화투판을 벌이고 밤샘하면서 다 함께 슬픔을 나눴다. 가족에겐 서로 간에 쌓인 갈등을 풀며 화해하는 장이기도 했다. 이런 풍경과 정서는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와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1996)에 잘 나타나 있다. 

한편으로는 망자와 유족의 사회적 지위와 존재감을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근조 화환과 문상객의 숫자는 곧 사회적 위세를 보여주는 척도로 받아들여진다. 어찌 본다면 우리의 장례 문화에선 망자는 조연에 불과하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주연이었던 셈이다.
 
<봄날> 영화의 한 장면

▲ <봄날> 영화의 한 장면 ⓒ 콘텐츠판다

 
영화 <봄날>은 아버지의 장례식 동안 장남 호성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소동극을 그린다. 연출과 각본은 <가시꽃>(2013), <현기증>(2014), <팡파레>(2020)를 작업한 이돈구 감독이 맡았다. 그는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아버지의 힘없는 뒷모습을 보며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봄날을 그리는 이야기를 떠올리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때 받았던 느낌을 기반으로 삼아 한물간 건달이 장례식장에서 겪는 좌충우돌이란 허구적 상상력과 유머를 더해 <봄날>의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호성이 범죄를 저지른 건달이기에 자칫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불편하게 느낄 여지도 충분하다. 허나 건달이란 드라마적 과장을 벗기고 본다면 호성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실패한 남자'다. 영화는 호성과 장례식장을 통해 한국 사회의 단면을 풍자하고 있다.

호성은 <축제>의 용순(오정해 분)이나 <학생부군신위>의 바우(김봉규 분)처럼 장례식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어머니 정님 외엔 불편하게 느끼는 장남이다. 아버지로서의 호성은 가족에게 도움을 주고자 제멋대로의 방식으로나마 최선을 다한다. 문제는 결과까지 안 좋다는 것이다. 열심히 하나 잘 안 풀리는 사람을 상징하는 게 바로 호성이다. 그에게 아버지 장례식장은 가족과 사회 내에서 자신의 현재를 되돌아보는 기회다.

<축제>가 문학 작품 같은 구성이 돋보이고 <학생부군신위>가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강하다면 <봄날>은 연극적인 색채가 짙다. <봄날>은 대부분 장면을 장례식장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진행한다. 당연히 대사와 그것을 소화하는 배우의 연기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돈구 감독은 현실적인 대사에 충청도 사투리와 욕설을 적절히 섞어 감칠맛을 더했다. 몇몇 장면은 컷을 나누지 않은 채로 길게 가져가는 '원테이크'로 찍어 연극처럼 배우들의 연기력을 극대화했다. 화장실에서 동생 종성과 아들 동혁이 대화를 나눈 후 이어서 호성이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인 원테이크 촬영으로 무려 10번 이상 찍었다는 후문이다.
 
<봄날> 영화의 한 장면

▲ <봄날> 영화의 한 장면 ⓒ 콘텐츠판다

 
<봄날>에선 연기파 배우 손현주, 박혁권, 정석용, 손숙, 박소진, 정지환이 멋진 앙상블을 펼친다. (이돈구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과 악이 공존하는 얼굴"을 가진 손현주 배우는 사고뭉치 호성을 미워 보이나 미워 보이지 않는 인물로 멋지게 분했다. "손현주 인생 연기"란 평가가 절대 과하지 않다.

정석용 배우는 <봄날>의 '발견'이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개성 넘치는 감초 연기로 사랑받은 정석용 배우는 <봄날>에서 등장 장면마다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특히 매장하는 무덤 앞 흙더미에서 춤을 추다가 구르는 장면이 압권이다. 정석용 배우의 비중이 큰 코미디 영화를 만나고 싶다는 상상도 해본다.

제목 <봄날>은 지나간 '봄날'일 수도 있고 앞으로 오길 희망하는 '봄날'일 수도 있다. 지금 소중한 이 순간이 '봄날'일지도 모른다. 이돈구 감독은 "우리가 사는 인생에서 제2의 전성기가 찾아왔으면,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은 역사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는 의미를 담아 작업했다"고 연출 의도를 밝힌다.

결국 <축제>, <학생부군신위> 그리고 <봄날>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해서 강조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죽음은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먼저 떠난 이를 보낸 우리는 함께 살아간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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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24프레임의 마음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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