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기간, 한국 대중가요를 선곡해 들려주는 라디오 음악방송 작가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음악은 잠든 서정성을 깨워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날에 맞춤한 음악과 사연을 통해 하루치의 서정을 깨워드리고 싶습니다.[편집자말]
드라마는 상상력을 자극한다. 더군다나 그것이 현실에 있을 법한 얘기인 경우, 몰입성은 극에 달한다. 

"저거, 내 얘기 같은데! 맞아, 맞아 나도 저런 적 있었어."

때로는 공감하고, 아주 간혹은 냉정한 평가를 하면서도 많은 이들이 드라마에 빠져드는 이유는 바로, 현실과 현실 그 너머에 있어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적절하게 버무려 아주 그럴듯한 이야기를 눈앞에 펼쳐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아픈 연속성을 그리다
 
 JTBC 드라마 <서른, 아홉> 한 장면.

JTBC 드라마 <서른, 아홉> 한 장면. ⓒ 장지혜

 
평소 공상으로 스물네 시간 중 반 이상을 보내는 내게도 드라마는, 허접한 상상력의 한계가 느껴질 때 아주 좋은 자극이 되고는 한다. 물론 드라마를 본방 사수하는 것의 의미가 점점 희미해지고 있는 요즘, 시리즈물 같은 것은 아예 OTT를 통해 몰아 보면서 작가의 화법을 따라가거나, 나름의 스토리를 새로 구성해 혼자만의 결론에 도달해 보는 즐거움을 만끽하곤 한다. 최근 이런 내 레이더망에 포착된 드라마 하나가 있었으니 바로 세 친구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삶의 아픈 연속성을 그린 JTBC <서른, 아홉>이다.

이미 종영된 드라마여서 OTT로 내리몰아봤다. 우선은 서른아홉에도 결혼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당당히 살아내는 그녀들이 부러워 늙어가던 내 마음이 봉곳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사랑을 새로 시작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걸 증명해준 작가에게는 고마움을 표하다가, 문득 어느 화에선 목 놓아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췌장암 말기 진단을 받은 친구 찬영(전미도 분)을 위해, 슬픔에 묻혀 지내기보다는 남아 있는 일상을 즐겁게 보내는 쪽(드라마니까 가능한 선택일테다)을 택한 친구들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미조(손예진 분)가, 아빠가 좋아하는 노래여서 자신의 최고 애창곡으로 꼽는다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담담하게 불러낸다. 아니 불러내다가 오열해 버린다. 그 대목의 가사는 바로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왠지 한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였다. 이 대목에서 가슴에 강물 하나가 출렁, 하는 걸 느끼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낭만'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굳이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낭만이라고 하면 왠지 아름답고 고귀한 것이나 비교불가로 멋진 어떤 것을 먼저 떠올리고는 한다. 또한 그 낭만이 사랑에 이르게 되면 장미꽃 한 다발을 두근거리는 가슴에 품고 연인에게 달려가는 한 사람을 그려보게 된다. 낭만은 그런 것이었다.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장기기억으로 남아 있던 낭만마저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다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가 수록돼 있는 앨범.

최백호 '낭만에 대하여'가 수록돼 있는 앨범. ⓒ (주)다날엔터테인먼트

 
'낭만에 대하여'가 자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그 해, 나는 오래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는 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저 어딘가에 필시 존재하는 '낭만'이라는 제국에서 황제로 살고 있을지도 모를 내 아버지의 젊은 얼굴을 그려보며 자꾸만 희미해지는 그와의 기억을, 애써 떠올려 보기도 했다. 내가 아는 한, 낭만이라는 단어에 최적화된 사람이 바로 내 아버지였으니까.

한껏 맵시 나는 헤링본 롱 코트에다 아무렇게나 무심히 입은 팬츠는 코트와 기가 막히게 색이며 재질이 어울렸는데 거기에 화룡점정은 허리띠를 대신해 맨 넥타이였다. 그리고 그의 입에선 장르를 막론한 노래가 늘 흘러나왔고, 다방 대신 선술집에 앉아, 오가는 이들을 술로 유혹하고는 했었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흔 줄 아버지의 모습이자, 낭만 바로 그 자체였다. 그래서 노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그려본 배경에는 옛날식 다방에 몹시도 잘 어울리는 모습으로 박자에 맞춰 몸을 흔들거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아버지가, 아주 자연스럽게 정경으로 녹아들어 있다.

최백호가 1995년에 발표한 노래 '낭만에 대하여'는, 최백호의 음악적 감수성을 집약한 곡이 아닐까 한다. 본인 스스로도 하늘에서 선물한 곡이라 칭할만큼, 평단과 대중을 동시에 사로잡은 곡으로 완성도도 높다. 탱고의 치명적인 리듬에 흐물거리듯 낭창낭창하게 들려오는 가사는 왠지 실연을 당한 무명의 시인이 술 한 잔을 기울이며 써내려 간 시 같다. 한 줄 한 줄에 인생이라는 술을 듬뿍 끼얹어 만들어낸 칵테일의 느낌도 난다. 한 마디로 끈적하지만 기분 나쁘지 않게 몸을 휘감아 오는 노래이다.

그런데 여기서 얘기하고 있는 낭만이 '옛날 식 다방이나 도라지 위스키, 그리고 짙은 색소폰 소리,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마담, 첫사랑 소녀, 항구, 뱃고동' 같은 소품들에 의해 점점 극에 달할 무렵, 낭만은 단순히 정물에 매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이 잃어버린 것'이라 정의한다. 그리고 갑자기 우리의 마음을 저 깊숙한 아래쪽으로 끌고 간다.

드라마 <서른, 아홉>에서 다시 만난 '낭만에 대하여'가 아니었으면 자칫 낭만을 한낱 '멋있는 낭만'으로만 간직할 뻔했다. 그리운 것들, 사라져 간 것들, 혹은 이제 곧 그리워질 것들, 그리고 사라져 갈 모든 것들이 남은 자들에게는 낭만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낭만의 기저에는 아름다움보다는 온 생을 통과해온 풀어 헤쳐진 슬픔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됐다. 

내게 낭만 그 자체로 존재하던 아버지도 결국은 떠났지만 낭만의 또 다른 형태인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젠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낭만이라 칭하고자 한다.

노래의 씨실과 날실을 엮는 이는 창작자와 가수이겠지만 그것을 좋은 원단으로 만들고 멋진 옷을 지어내는 것은 아마도 노래를 듣는 이들의 몫이 아닐까 한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애초에 의도하지 않았던 어떤 이면의 것을 읽어내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 일 또한, 우리들의 몫일 거다.

그리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낭만은 무엇을 향하여 어디로 질주하고 있는가, 가끔 질문을 던져 볼 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후에 기자의 개인 브런치 https://brunch.co.kr/@ggotdul 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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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음악방송작가로 오랜시간 글을 썼습니다.방송글을 모아 독립출간 했고, 아포리즘과 시, 음악, 영화에 관심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소소한 이야기에 눈과 귀를 활짝 열어두는 것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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