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미국 콜로라도에서 일명 '킬도저 사건'이 일어난다. 개조한 불도저로 동네를 박살낸 이 희대의 사건은 이름과는 달리 인명피해는 거의 없었다. 사건의 배경은 이랬다. 자신의 토지 주변에 시멘트 공장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보상을 요구한 협상이 파탄되자 공장 측은 토지 주변을 빙 둘러 포위하듯 공사를 시작한다. 졸지에 섬처럼 고립된 토지 주인은 시의회와 행정당국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외면당한다.
 
여기에 여러 불우한 상황이 겹치면서 자포자기 끝에 그는 중장비 기사인 자신의 직업을 살려 본인 소유의 불도저를 개조하기 시작한다. 공권력의 진압을 거부하기 위해 강철과 콘크리트로 차체 외부를 보강하고, 최루탄에 대비해 차내 여압장치를 갖췄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외부 관측 카메라를 여러 개 설치하고 먼지와 파괴를 막고자 강화된 투명플라스틱을 덧씌운다. 저격 총과 자동소총 등의 총기를 차내에서 사격 가능토록 개조했다.
 
서울 을지로 일대 철공소에선 도면과 재료만 있다면 탱크라도 만들 수 있다는데, 이 땅주인은 혼자서 중전차 급의 괴물을 탄생시켰다. 복수를 위해 그는 킬도저를 몰고 거리로 나선다. 관공서와 재판관의 자택 등 (주로 범인이 원한을 품을만한) 여러 건물이 말 그대로 박살이 나 버린다. 다행히 사전에 주민들에게 대피하라는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이름과 달리 타인의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재산피해는 막대했고 이미 모든 걸 다 잃은 범인이었기에 보상을 청구할 방도도 없었다. 범인은 킬도저가 더 이상 못 움직이게 되자 권총으로 차량 안에서 자살한 뒤였다.(애초 킬도저에서 자력으로 이탈이 불가능한 구조였다) 당시 주방위군 소속 공격헬리콥터와 대전차미사일까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대기 중이었다고 전한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무섭다'는 교훈과 함께, 범인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 사태를 파국으로 이끈 지자체에 대한 비난이 사건 이후 쏟아졌다. 워낙 충격적인 사건이라 세계적인 파급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더 이상 지키거나 기댈 곳 없어 역설적으로 두려울 게 없어져버린 외톨이 늑대들의 반란은 세계 곳곳에서 자생적으로 비슷한 사회적 원인에 의해 자연 발생하는 중이다.
 
<리바이어던>과 <천주정>, 부패 카르텔이 낳은 비극
 
2014년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즈비아긴체프의 <리바이어던>은 감독이 인터뷰에서 바로 이 '킬도저' 사건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감독이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마침 좋은 회피수단을 찾아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영화의 개요는 지방 소도시에서 고집은 좀 있지만 가족과 함께 평온히 살던 남자가 자신의 집과 토지를 빼앗아 별장 터로 사용하려는 지역 권력자에 맞서다 파멸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영화를 접한 다수의 시선에 해당 작품은 당대 러시아에 만성화된 (관료와 기업과 조직폭력이 공생하는) 거대한 부패 카르텔 구조를 직격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 문화부의 지원으로 제작된 <리바이어던>에 대해 좌우로 나뉘어 러시아 국내에선 찬반논쟁이 격화되었고 정부 관계자들은 입장 표명과 해명에 분주하게 수습하러 뛰어다녀야 했다.
 
<리바이어던>의 주인공은 자신의 의지와 총, 그리고 변호사인 절친의 조력에 힘입어 지방정부의 유력인사를 상대로 끈덕진 투쟁을 이어가지만 레드 마피아의 폭력과 정경유착의 강고한 동맹 앞에서는 법제도도, 개인의 완력도 결국 온전한 힘이 되지 못한다. 그의 패배와 몰락은 정의가 패배하는 숙명론적 디스토피아로 러시아의 현재 체제를 거울 반사하듯 규정짓는다.
 
<리바이어던>이 공개되기 바로 전해인 2013년, 칸 영화제 각본상은 중국 감독 지아장커의 <천주정>이 수상했다. 현대 중국의 도덕적 파탄과 불의한 현실을 묘사한 네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영화 속 첫 번째 이야기의 주역 '따하이'는 동네 이권을 장악해가는 기업에 맞서 고독한 싸움을 계속 이어간다. 하지만 그의 편은 없다. 주민들은 따하이의 어릴 적 동네 친구인 기업가가 뿌리는 떡고물에 취했고 모두가 기업가를 동네의 구세주처럼 떠받드는 상태다.

따하이는 점점 고립되어만 간다. 그는 끝내 기업과 결탁한 공권력에 의해 누명을 쓰고 자포자기 상태에서 복수극을 벌인다. 영화 전체 에피소드 중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는 순간이 펴려진다. 따하이 캐릭터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중국 전통 극 레퍼토리 <<수호전>>의 무법자 영웅들과 닮은꼴이다. 하필 전통 극의 내용도 에서 양산박 호걸이 피의 복수를 다짐하고 관객들이 이를 응시하는 장면과 직결되는 흐름을 보여준다.
 
시민들의 참여민주주의가 쇠퇴하고, 중립적 감시와 견제가 취약한 변경 혹은 작은 사회로 갈수록 위와 같은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그나마 보는 눈이라도 좀 많으면 신경 쓸 구석도 조금은 고려해야 하기에 겉으로라도 그럴싸하게 나름대로 합리적 이유를 대는 시늉이라도 하겠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지방에선 어디 눈치 볼 것 없이 군림하는 자의 횡포가 일상화된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향토사회의 전통과 협동은 종종 억압과 위계로 변이되어버린다.
 
그렇게 토호와 결탁한 지방권력의 만행과 이에 짓밟히는 약자들의 수모, 그리고 그 귀결로서의 폭발과 파국은 현실을 위로하거나 대리만족시켜주는 판타지로 기울기 쉽다. 그와 반대로 사회적 주제를 구현하려는 독립예술영화들은 현실 모순을 극명하게 각인시키는 암울한 리얼리티의 극한으로 마침표를 찍곤 한다. 잃을 게 없는 자들의 분노는 그 예측불가의 속성 때문에 누구에게나 두려움을 가져오는 존재가 된다. 사회의 상식과 작동 룰을 초월하기에 대응하기가 여간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 분노의 불길이 강자에게로 향할 때 대중의 동정을 얻거나 하다못해 가십으로라도 오르내리게 되곤 한다. 반면에 약자에 대한 분풀이는 보다 쉽게 발견되지만 금방 잊힌다. 후자의 경우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속성 때문에 '잃을 게 그나마 남아있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반대로 사회적 질서나 규범을 초월한 듯 평범한 이들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탈행위, 강자에 굽히지 않거나 골탕을 먹이는 지극히 희귀한 사례에 대중은 열광하곤 한다. 역사상 '의적'이라 불리는 자들은 그 경계선상에 속하는 존재들이다.
 
배우의 재발견
 
이제야 <불도저에 탄 소녀>를 이야기할 차례가 돌아왔다. 이 영화는 동시대 한국을 배경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자의 저항을 우리 사회 특유의 가족주의와 결합해 선보인다. 제목은 물론, 이야기의 설정과 전개에서 상당부분 '킬도저'의 사례를 참고한 티가 역력하다. (영화 포스터에서부터 벤치마킹의 기운이 직접적으로 느껴진다) 부당함에 항거하다 파국으로 치닫는 외톨이 늑대 포지션의 주인공 '구혜영'은 김혜윤이 맡았다. <스카이 캐슬>의 강예서로 얼굴을 각인시킨 후 <어쩌다 발견한 하루> <어사와 조이> 등의 드라마를 성공시키면서 인기를 이어가는 중이다.
 
흥행 드라마로 신데렐라가 된 연기자로 쉽게 단정하기 쉽지만, 알고 보면 김혜윤은 대학 시절 숱한 단편영화로 내공을 갈고 닦아온 상당한 경력의 소유자다. 그녀가 맡은 구혜영은 한쪽 팔에 용 문신을 한 채 수시로 폭행으로 경찰서를 들락거리는 반항아다. 학교에도 다니지 않고 싸움을 일삼으며 중국집을 운영하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좋지 않아 보인다. 입에는 욕을 달고 살다시피 하는데다 어른에게도 자신이 존중하지 않으면 경어를 쓰지 않는 캐릭터다. 모종의 사건을 파헤치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비밀들, 그리고 남은 가족들 책임져야 한다는 무거운 책무가 그녀의 어깨를 짓누른다.
 
본 작품이 주인공 혜영 역을 담당한 김혜윤에게 의지하는 부분은 절대적이다. 무척 부담스러웠을 몫인데도 김혜윤 배우는 그에 충분히 부합하는 활약을 넘어 오직 그녀만이 빛나는 순간들을 무수히 쏟아낸다. 반면에 영화 홍보에서 강조하던 다른 배우들의 비중은 선전된 내용에 비해 실제로는 적게 느껴진다. 그리고 주변 인물들 대부분은 다소 전형적인 캐릭터성에 그치는 경우가 기본이다. 김혜윤의 어깨는 실로 무겁기만 하다. 슈퍼주니어 예성은 사실상 특별출연에 가깝고 '만랩' 배우 박혁권의 연기는 명불허전 출중하지만 본 작품에서 그의 역할은 신파적 감정을 끌어올리는데 주로 전용된다. 그저 지고지순한 심성을 가진 비극적 캐릭터에 그치는 활용법 위주다. 그리고 그의 과거 행적과 파국에 이르는 과정은 설명은 후반에 상당부분 이뤄지지만 충분히 관객에게 각인되는 힘은 약한 편이라 아쉽다.
 
김혜윤이 맡은 혜영과 대치하는 거악의 근원인 최회장 역의 오만석 배우 역시 능숙한 연기를 선보이지만 개성적인 면모보다는 정형화된 악당에 가깝다. 그 외에 주인공 주변 대다수 인물들이 어떻게 하면 그녀를 더 벼랑으로 내몰 수 있는가 노력을 경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변인물 대부분이 무난한 연기력을 선보이는 바람에 점점 주인공은 절망으로 내몰리게 된다.
 
사실 초반부엔 분노조절장애로 비춰지기 딱 좋은 모양새인 혜영의 캐릭터다. 그저 소리만 질러대고 화가 나면 용 문신을 한 팔을 휘두르며 뜻 모를 분노를 (속에 담아뒀다간 화병으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아) 욕설과 함께 밖으로 배출하지 못하면 큰일 날듯 보인다. 그렇게 다소 과잉의 억지 캐릭터로 느껴지던 주인공에게 중반쯤 지나면 이제는 좀 곁에 누구라도 있어줬으면 하는 소망이 저절로 생길 정도로 감정이 이입된다.
 
한국독립영화를 즐겨보는 이들이라면 낯이 설지 않는 두 명의 여자배우가 출연한다. 특히 한혜지 배우는 주인공과 그의 아버지를 영화 속 등장인물 중 가장 효과적으로 잘 상대하는 내공을 구사하며 씬 스틸러를 소화해낸다. 배역의 특징이라면 주인공에 대해 어떤 개인적 악의가 없이 그저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기 위해 구혜영(과 그의 아버지)에 대항하는 장면이 눈에 밟힌다는 점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도구적 용도로 투입되었다 사라지는 반면 입체적 개성을 부여받은 드문 경우다. 이런 내용의 영화들에서 공권력과 관계자들은 대개 무능하거나 별 도움이 되지 않게 마련이고 주인공을 해꼬지나 하지 않으면 다행인 바, 본 작품 또한 그런 규격화된 법칙을 충실히 따른다.
 
또한 대립구도에서 주인공을 조력하지 않고 배신하거나 적대하는 주변인들의 설정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이모부와 이모의 경우 사악한 심성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환경 탓에 회사의 편을 들거나, '현실을 직시하라'며 주인공에게 포기할 것을 종용한다. 결국 파국에 도달하기까지 주인공과 어린 동생이 의지하거나 도움을 받을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클라이막스의 폭주가 정당성을 부여받는 셈이다.
 
모아둔 에너지를 한 번에 방출하는 영화적 쾌감
 
결국 영화에서 긴장과 흥미를 책임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돌격 대장이자 주력부대 포지션은 오직 김혜윤 배우의 숙명이다. 그 중압감을 충분히 인지하고 각오를 다진 것처럼, <불도저에 탄 소녀> 작품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관객은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 내내 김혜윤의 표정과 시선, 말투에 집중하게 될 뿐이다.
 
다만 주인공 가족의 관계에 대한 의구심이나 주인공의 과거에 대한 개연성 설정의 전달력이 다소 미흡한 편이라 전반부에서는 그녀의 열연이 신경질적 편집광으로 오해될 구석이 존재한다. 그런 주인공이 초반의 위악적 행태에서 그냥 외톨이 늑대가 아닌, 소중한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영화 전체 분량의 8할이 지나갈 즈음부터 변모한다. 몇 가지 의미심장한 상징 표시를 통해 주인공의 변화가 확인된 후에 곧바로 이어지는 불도저와의 합체는 그저 분노조절장애가 아닌 약자의 반란 혹은 봉기로 해석될 만큼의 공감대와 설득력을 부여해준다.
 
후반부 일련의 상황에 배우 김혜윤의 연기력은 뿜어져 나오듯 솟구친다. 김혜윤의 눈빛을 관객은 그저 따라가게 된다. 그 폭발의 순간이 종료된 뒤 에필로그의 마무리는 다소 진부하다. 그저 마지막 반전 직전에 막을 내렸다면 더 좋았겠다 하는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혜윤이라는 배우는 스스로 빛을 내며, 받은 빛은 두 배로 반사해내는 활약을 끝까지 사수한다.
 
세상을 향해 모든 게 아니꼽던 불만투성이의 잔뜩 날이 선 외톨이 늑대에서 차분하고 책임질 줄 아는 청춘의 성장으로 귀결되는 <불도저에 탄 소녀>의 이야기는 그 전형적 클리셰와 대다수 연기자들의 안타까운 활용도에도 불구하고 김혜윤이라는, 미래가 촉망되는 배우의 폭발력을 극대화시키는 데에는 성공적인 면모를 선보인다. 영화 한편을 통째로 끌고나가는 김혜윤이 빛을 발하는 이제 첫 번째 장편 주연 작품이다.
 
<작품정보>
 
불도저에 탄 소녀 The Girl on a Bulldozer
2021|한국|드라마
2022.04.07. 개봉|112분|15세 관람가
감독 박이웅
주연 김혜윤(구혜영 역), 박혁권(구본진 역), 오만석(최영환 역)
출연 박시우(구혜적 역), 한혜지(경원/한국손해보험[목소리] 역), 예성(고유석 경위 역)
제작 고집스튜디오
배급 트윈플러스파트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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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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