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 포스터

▲ 긴 하루 포스터 ⓒ 하준사

 
제작자에서 연출가가 된 감독이 있다. 이윤기의 <멋진 하루>, 장훈의 <영화는 영화다>, 김기덕의 <비몽> 같은 영화를 제작했던 조성규다. 광화문 독립영화관 '스폰지하우스' 대표이기도 했던 조성규는 영화를 좋아하다가 직접 영화를 찍게 된 드문 사례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혹자는 조성규를 홍상수의 아류라고 부른다. 그가 연달아 내놓은 작품들에서 홍상수 영화의 분위기가 짙다는 게 그 이유다. 불륜이란 소재, 잦은 술자리, 영화감독이나 작가의 등장 같은 것들은 홍상수와 조성규를 한 묶음으로 보이게끔 하는 주요한 요소다. 실제로 2010년 처음 내놓은 <맛있는 인생>부터 매년 한두 편씩 꾸준히 발표한 그의 영화들에선 조성규가 굳이 감추려하지 않은 홍상수의 흔적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화의 질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커다란 문제의식이나 응집력 있는 서사 대신에 인물들의 감정과 상황에 집중하는 홍상수식 영화가 한국에서 분명한 관객층을 형성하고 있는 영향이다. 조성규의 영화가 그리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는 평가를 받아왔음에도 매번 꾸준한 관객층이 있는 건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긴 하루 스틸컷

▲ 긴 하루 스틸컷 ⓒ 하준사

 
다시 강릉을 찾은 조성규 감독

<긴 하루>는 조성규의 최신작이다. 연결된 듯 연결되지 않은 듯 불명확한 네 개의 이야기가 배우를 바꿔가며 옴니버스 형식으로 이어진다. 배경은 조성규의 영화가 자주 선보이는 강릉이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소설을 쓰는 사람,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이 강릉을 찾아서 저마다의 하루를 보낸다. 큰 감나무가 있는 집과 기차가 지나가는 횟집과 바다가 보이는 작업실과 커다란 소나무가 늘어선 숲과 조용한 카페 같은 장소가 연이어 비춰진다. 김동완, 남보라, 김성제, 김혜나, 서준영, 선민, 신소율, 정연주 같은 배우들이 각 장에 등장해 제가 맡은 인물들을 연기한다.

처음은 강릉의 어느 집이다. 막 이사를 온 듯한 남자와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여자가 만난다. 여자는 대뜸 자기가 전에 살던 사람이라며 놓고 온 물건이 있다고 찾아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자가 찾는 물건은 어디에도 없다. 여자도 물건을 찾으려는 의지가 커 보이지는 않는다. 남자에게 이런저런 주의사항을 알려준 여자는 그와 근처 국밥집에서 식사를 하자고 한다. 첫 이야기는 그와 그녀의 요상한 만남이다.

두 번째는 영화를 찍기 위해 장소헌팅에 나선 여자와 그를 돕는 남자다. 연인관계인 이들은 여자가 남자동기와 술을 마시고 실수를 한 일로 예민한 상태다. 여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지만 남자는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다. 함께 바닷가를 거닐고 식사를 하는 동안 둘은 다투고 풀어졌다 다시 다투고는 한다.
 
긴 하루 스틸컷

▲ 긴 하루 스틸컷 ⓒ 하준사

 
서로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인물들

세 번째 이야기는 사망한 시나리오 작가의 유품을 찾으러 온 남편의 이야기다. 작가는 감독과 주말마다 강릉 펜션에서 지냈는데 감독의 아내는 그들의 부적절한 관계를 의심한다. 작가의 남편은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지만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어 답답해한다.

마지막 네 번째는 자전적 소설이 영화화를 앞둔 상태에서 등장하는 인물의 동의를 구하러 온 소설가의 이야기다. 서로 다른 기억을 놓고 갈등하는 소설가와 그가 만나러 온 카페 사장, 그리고 그 곁에 선 출판사 사장의 대화가 긴장감을 자아낸다.

영화는 네 개의 이야기 속 인물에게 서로 같은 이름을 부여한다. 현수와 윤주, 정윤과 소영으로, 인물마다 셋에서 두 명 씩의 배우가 연기했다. 어째서 그런 시도를 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야기가 서로 아귀가 맞아 돌아가진 않기 때문이다. 연기한 배우들 역시 그 이유를 명확히 짐작하진 못한 듯 보인다.

명확한 건 하나도 없는 듯한 <긴 하루>에서 그나마 선명한 것은 감정이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등장해 만나고 헤어지고 화를 내고 애틋해하며 그리워하다 재회하는 과정들이 펼쳐지는 것이다. 배우들에게 구체적인 지시 대신 배우가 느끼는 그대로를 자유롭게 표현하길 원했다는 감독의 영향일까. 영화 속 여러 인물들의 연기도 저마다 제각각이다. 같은 이름을 공유하는 인물이 여럿으로 어떤 일관성을 기대하게도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면 전혀 다른 분위기에 연관성보다는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감독이 무엇을 의도하고 이러한 시도를 했는지는 조성규의 영화가 늘 그렇듯 쉽게 단정할 수 없다.
 
긴 하루 스틸컷

▲ 긴 하루 스틸컷 ⓒ 하준사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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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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