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이성계의 쿠데타인 1388년 위화도회군 이후를 다루는 KBS <태종 이방원>은 고려 우왕 부자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줬다. 회군으로 우왕이 폐위되고 아들 창왕이 옹립된 뒤 공양왕이 추대되는 과정을 보여준 19일 제4회 방영분에서 우왕 부자의 마지막을 묘사했다. 만 24세 된 우왕과 9세 된 창왕이 이성계 측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이었다. 15년 차이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나는 서글픈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음력으로 우왕 14년 5월 22일(양력 1388년 6월 26일) 감행된 위화도회군 직후의 이성계는 쿠데타 주역이기는 했지만 상황 장악력은 완전치 못했다. 요동 정벌을 명한 우왕과 최영 장군은 그에게 5만 대군 전체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최영은 자신이 신임하는 조민수를 우군도통사 이성계보다 격이 높은 좌군도통사에 임명했다.
 
그런 구도 속에서 조민수를 끌어들여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에, 회군 직후의 이성계는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조민수의 리더십을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을 조민수는 놓치지 않았다. 신주류인 신진사대부들을 이끄는 정신적 구심점인 대학자 이색과 손을 잡았다. 그런 뒤 우왕의 후임자로 창왕을 옹립해 왕실의 호감을 이끌어냈다.
 
조민수-이색 연합은 이성계의 앞길에 장애물이 됐다. 우왕 축출을 주도한 이성계로서는 그 아들을 임금으로 모신다는 게 당연히 불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조민수를 불편하게 여겼던 이성계에게 반격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 조민수의 연이은 패착이었다.
 
조민수는 정권 1인자가 됐다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남의 노비와 토지를 강탈했다. 그것에 더해, 최영에게 밀려난 구세력 지도자인 이인임의 사면·복권까지 추진했다. 개혁세력인 신진사대부들이 가장 혐오하는 인물 중 하나인 이인임을 사면·복권시키려 했던 것이다. 조민수와 신진사대부들 사이에 생긴 이 같은 틈을 놓치지 않고 이성계 측은 조민수를 공격했다. 부정부패 혐의를 적용해 그를 실각시켰다.
 
'폐가입진'이 불러온 결과
 
 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창왕 정권의 주춧돌인 조민수를 숙청한 뒤 이성계 측이 추진한 것은 창왕 폐위였다. 이를 위한 명분이 된 것이 폐가입진(廢假立眞)이다.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는 이 논리는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니라 신씨라는 명제를 전제로 했다. 가짜들이 임금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들을 몰아내는 것은 쿠데타가 아니라 합법이라는 이미지를 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결국 이 논리로 인해 우왕과 창왕 부자는 태어난 해는 달라도 죽는 해는 같은 부자가 되고 말았다.
 
우왕의 아버지인 공민왕은 승려 신돈을 앞세워 구세력인 권문세족을 약화시키고 신진사대부들을 중앙 정계에 안착시켰다. 그런 뒤 신돈이 너무 강해지자 그를 숙청하고 유배 보냈다. <고려사> '우왕 세가(우왕 편)'에 따르면, 그 직후에 공민왕은 측근들에게 신돈의 여종이 자기 아들을 낳았으니 잘 보호해달라고 당부했다(사료 원문은 기사 하단 동영상에서 참고).
 
아버지가 '이 아이는 내 아들이다'라고 인정했으니, 이를 반박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 아버지가 국법과 왕명을 만들어내는 아버지였기에 더욱 더 그러했다. 그런데도 훗날 이성계 측은 우왕 부자가 실은 신씨였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우왕은 왕우가 아니라 신우이며 창왕은 왕창이 아니라 신창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논리를 내세워 우왕·창왕의 대를 끊고 공양왕을 허수아비 임금으로 추대했던 것이다.
 
이성계 측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권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그 이전 상황들에도 적지 않게 기인했다. 우왕의 혈통과 관련해 시비를 촉발할 만한 요인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공민왕이 신하들에게 아들의 존재를 밝힌 것은 우왕이 만 6세 때였다. 그때까지 우왕은 신돈의 보호를 받으며 살았다. 우왕의 어머니인 반야는 신돈의 노비였다. 그런 반야에게서 출생한 우왕이 신돈의 보호를 받았으니,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를 만도 했던 것이다.
 
게다가 공민왕이 우왕을 자식으로 인정한 시점은 신돈과의 관계가 틀어진 뒤였다. 공민왕과 신돈의 관계가 파탄된 뒤에 '신돈이 보호했던 아이가 실은 임금의 아들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두 남자의 신뢰관계가 파괴된 뒤에 그런 이야기가 나왔으니, 신돈이 정말로 공민왕의 아이를 보호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나올 법도 했던 것이다.
 
그에 더해, 아들의 혈통 문제를 봉합하고자 공민왕이 내놓은 결정적 한 방도 결과적으로 아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공민왕 역시 우왕이 반야의 몸에서 태어난 사실을 난처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우왕 세가'에 따르면, 1374년에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공민왕은 우왕의 혈통에 관한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세상을 떠난 자신의 후궁인 한씨가 진짜 생모였다고 발언한 것이다.
 
공민왕은 처음에는 반야가 생모라고 말했다. 그랬다가, 이미 죽은 후궁이 진짜 엄마라고 말을 바꿨던 것이다. 당사자 한씨의 진술이 불가능한 시점에 한씨와 우왕을 연결 지은 것이다. 신돈의 노비가 자기 아들을 낳았다는 점에 대해 공민왕이 얼마나 큰 부담을 느꼈는지 알 수 있다.
 
 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 KBS

 
공민왕의 번복은 우왕의 혈통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킬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사람의 입에서 전혀 다른 발언이 나왔으니, 우왕의 혈통이 석연치 않다는 의심이 생기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우왕이 태어난 직후에, 그리고 신돈과의 관계가 좋았을 때에 우왕을 아들로 입적했다면, 공민왕이 죽기 직전까지 아들의 혈통 문제를 고민을 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무 늦게 아들로 인정한 것과 뒤늦게 발언을 번복한 것이 훗날 우왕 부자의 비참한 최후를 촉진한 요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이성계 측이 놓치지 않고 정권 교체를 위해 활용했던 것이다.
 
우왕은 1374년부터 14년간 국정을 운영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민왕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랬던 그가 14년 뒤에 느닷없이 신우로 바뀌고 그의 아들은 신창으로 바뀌었다. 이는 우왕 부자가 권력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아버지이며 할아버지인 공민왕이 시의적절하지 못한 대처로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볼 수 있다.
 

▲ 우왕을 아들로 인정하는 공민왕의 발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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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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