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순간> 포스터

<빛나는 순간> 포스터 ⓒ 명필름

 
제주도를 다룬 영화에서 가장 즐겨 쓰이는 소재가 무엇일까. 답은 해녀다. 제주에서 삶을 꾸려가는 많은 이들 가운데 눈에 띄게 힘들고 사연이 많으며 다른 곳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것이 해녀이기 때문이다. 해녀는 일의 위험과 고됨 탓에 사라져가는 업종으로 알려졌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해녀가 사라지는 걸 막고자 해녀학교를 꾸려 운영하는 곳도 있지만 그 수는 갈수록 줄고만 있다.

해녀는 지난 시대 제주의 여성을 대표했다. 조선 말기 특산품 진상에 시달린 남성포작들이 비운 자리를 대신 채운 해녀들은 제주민의 생계를 책임지는 모성, 그 자체였다. 열악한 장비로 제주의 거친 바다와 싸우며 값진 해산물을 건져 올리는 해녀가 있어 제주의 삶이 이어질 수 있었다. "똘 나민 도새기잡앙 잔치곡, 아덜 나민 발길로 조로팍차분다(딸을 나면 돼지 잡아 잔치하고 아들 나면 발길로 궁둥이를 찬다)"는 말과 "여자로 나느니 쉐로 나주(여자로 태어나느니 소로 나는 게 낫다)"란 속담이 공존하는 현실은 제주 여성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곧 사라질지 모를 애달픈 직업군은 예술의 관심을 피할 수 없다. 해녀가 등장하는 영화가 끊이지 않고 제작된 건 그 이유에서다. 아예 해녀를 중심인물로 등장시킨 영화도 여럿이다. 2004년 <인어공주>, 2016년 <계춘할망>, 2020년 <빛나는 순간>이 대표적이다. <인어공주>와 <빛나는 순간>에선 제주 출신 배우 고두심이 해녀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숨비소리와 같이 해녀를 상징하는 요소들도 널리 알려졌다.
 
 <빛나는 순간> 스틸컷

<빛나는 순간> 스틸컷 ⓒ 명필름

 
사라져가서 더 아름다운 것

영화는 해녀를 그저 모성의 상징으로만 놓아두지 않았다. 억척스럽게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담아내길 잊지 않았지만 여성으로서 사랑하고 아파할 줄 아는 모습도 함께 찍어냈다. 특히 소준문 감독의 <빛나는 순간>과 같은 영화는 해녀와 육지에서 온 남성 간의 로맨스를 다룬 희귀한 작품이다. 나이를 뛰어넘어, 그것도 노년에 접어든 여성과 젊은 남성 간의 사랑을 다뤘다는 점에서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구석도 없지 않다.

<빛나는 순간>은 육지에서 온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 분)과의 만남을 통해 저의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마주하는 해녀 진옥(고두심 분)의 이야기다. 제주에서 제일가는 해녀로 손꼽히는 진옥은 방송국의 촬영 제안을 번번이 거절해 PD들의 애를 타게 했는데, 이번에 그녀를 설득할 적임자로 경훈이 내려온 것이다. 경훈은 진옥 가까이를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고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

나이는 먹었지만 여전히 여성으로서의 자신을 발견하는 진옥의 내적 갈등과 제 감정에 충실하게 돌진하는 경훈의 이야기는 같은 설정의 <해롤드와 모드>가 제작된 지 반세기가 흘렀지만 여전히 공고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외벽을 더듬어 헤아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빛나는 순간> 스틸컷

<빛나는 순간> 스틸컷 ⓒ 명필름

 
요양부담 허덕이는 개인의 삶

영화가 역시 제주를 배경으로 한 2017년 작 <시인의 사랑>과 눈여겨 볼만한 몇 가지 공통점을 가졌단 점도 볼거리다. 하나는 두 영화 모두 사회적 금기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시인의 사랑>이 동성 간의 연애와 무기력한 가장의 외도라는 두 가지 금기에 도전했다면 <빛나는 순간>은 나이 차를 뛰어넘은 로맨스에 도전한다.

또한 두 영화 모두 거동이 불편한 가족을 책임지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제주를 다룬 영화에서 거동이 불편한 가족 구성원과 그를 부양하는 다른 가족의 고통은 제주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는 전국 평균을 웃도는 노인 비율에도 요양기관이 부족해 요양문제가 터져 나올 조짐이 일고 있다. 노인층의 상대적 빈곤 비율 역시 심각해 이 같은 상황이 영화에도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빛나는 순간>이 실제 빛나는 순간을 잡아냈는지, 또 영화적으로 빛나는 순간에 도달했는지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린다. 고두심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지현우의 얄팍한 연기를 지적하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영화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제주를 아름답게 잡아냈다는 점에 대해선 이견의 여지가 얼마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한 곶자왈 같은 명소가 <시인의 사랑>이나 <계춘할망>에서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그려진 데는 특별한 노력이 깃들어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도 그 비결은 제주에 대한 제작진의 애정이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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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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