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홍천기>.
SBS
그렇게 소중한 어진을 항상 감추어 두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어진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 정치적 효과를 추구하기도 했다. <홍천기> 속의 왕실 사람들은 어진의 '은밀한 보관'에만 주목하고 있지만, 실제의 왕실 사람들은 그것의 '공개적인 이송'에도 주목했다.
왕조시대 대중들이 볼 때, 어진의 이송은 신(神)의 이동 비슷한 것이었다. 그래서 왕실 사람들은 어진의 공개적인 이송이 갖는 정치적 기능에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첩의 아들이라는 이유에 더해 첩의 장남도 아니고 차남이라는 이유로 말도 못 할 콤플렉스를 겪었던 광해군 역시 그것의 정치적 효용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계의 고향인 함경도에 있던 태조 어진 중 하나를 이성계의 본관인 전주로 옮길 때도 광해군은 그 효용성에 관심을 기울였다.
어진 이송이 있었던 1614년(광해군 6년)은 선조 임금의 적장자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이 광해군 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해다. 양력 3월 19일(음력 2월 10일), 영창대군이 살해당한 그해에 광해군 정권은 태조 어진을 함경도에서 전라도로 이송했다. 서얼의 측근 사람들이 적장자를 죽여 서얼 임금의 정통성 문제가 부각됐던 시기에 임금의 권위와 직결되는 어진의 이송이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 6년 7월 29일자(1614년 9월 2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광해군은 어진 이송을 위해 만반의 주의를 기울였다. 의례에 사용되는 물품을 청결히 하라고 지시했을 뿐 아니라 최종 목적지인 전주 경기전까지 어진이 통과할 역(驛)들을 깨끗이 청소할 것까지 당부했다. 그런 뒤 음력 9월 9일(양력 10월 11일) 한양 서대문 밖 서교(西郊)로 나가 어진을 영접하고 직접 제사까지 지냈다.
광해군이 단순히 정성만 들인 게 아니라 정치적 효과까지 염두에 뒀다는 점은 어진 이송에 맞춰 기획한 행사들에서도 드러난다. 지난 6월 30일 발행된 <대동문화연구> 제114집에 수록된 유재빈(劉宰賓) 홍익대 교수의 논문 '움직이는 어진 - 양란(兩亂) 전후 태조 어진의 이동과 그 효과'는 이렇게 설명한다.
태조 어진의 영향력은 한양에서뿐 아니라 경기전이 있는 전주와 어진 행차 노정 중에도 행사되었다. 전주에서는 어진이 봉안된 후 시재(詩才)를 내려보내 과거시험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 4명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한편, 어진의 행차 노정 중에는 백성들의 상언(上言)과 격쟁이 뒤따랐다. 마치 어가 행렬처럼 백성들이 길가에 나와 장첩(狀帖)을 바치기도 하고 전북 고산에서는 현감을 고발하려고 억울한 백성들이 길에서 호소하고 산에 올라 고함을 지르기도 하였다.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치르고 백성들이 탄원을 하고 사또를 고발하는 갖가지 일들은 백성과 임금을 연결해주는 일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이런 일들은 군주에 대한 백성들의 의존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시조신(神)인 이성계의 어진이 광해군 정권의 호위를 받으며 이송되는 동안에 백성들과 광해군을 연결시키는 이벤트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위 논문은 "광해군에게 태조는 전쟁의 승리자이자 왕실의 시조로서 자신의 전란 극복을 선전하고 부족한 정통성을 보완할 수 있는 상징적인 존재였다"며 "광해군은 태조 영정 의례와 봉안 장소를 직접 조정함으로써 이를 정치적인 행사로 활용하고자 하였다"고 평가한다.
이런 사례들에서도 나타나듯이, 옛날 왕실은 죽은 왕의 어진을 은밀히 보관하는 일뿐 아니라 세상에 드러내 공개적으로 이송하고 이를 통해 '대통령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일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옛날 사람들이 볼 때, 어진이 이송되는 과정은 왕조의 수호신들이 움직이는 모습과 비슷할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