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12월 말이라니...'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오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신음한 2020년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라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 대중문화들이 많은 힘을 줬을 듯한데요. '2020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에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순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tvN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tvN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 tvN

 
연초가 까마득한 옛날인 듯하고 1년이 이렇게 길게 느껴졌던 적이 있었던가 싶은데 어느새 12월이다. 기억을 되짚어 보니 올해 시작은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과 함께였던 것 같다. 2019년 12월 14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매번 토요일을 기다리게 만들었고 일요일이 지나는 것을 아쉬워하게 했다. 일요일이 지나면 재방송을 보면서 다음 회차가 방송되기 전까지의 지루함을 달랬다. 그렇게 계속 보면서도 회차가 넘어가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드라마는 2월 16일 종영됐다.

얼마 전 한류 드라마 인기를 전하는 뉴스에서 넷플릭스에서 상영되는 <사랑의 불시착>에 관한 기사를 접했다. 몇몇 나라에서 신드롬을 일으킨다는 보도를 접한 뒤 내 것을 너그럽게 나누는 것처럼 마음이 뿌듯했다. 이참에 아직 가시지 않은 드라마의 여운을 이어가려고 첫 회부터 다시 정주행했다.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드라마에 빠지는 나를 보고 가족들은 드라마의 장면 하나하나를 외우려는 거냐며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배우들의 연기와 드라마 속의 풍경, 그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그런 말 정도는 가뿐히 넘길 수 있을 만큼 크게 와 닿았고, 마치 현실에 그러한 인물과 상황이 있을 것 같은 설렘과 흥분을 가졌던 것 같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 tvN

 
드라마를 보며 주연 배우에 대한 팬심은 더욱 두터워졌다. 연예인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좋아도 그만, 싫어도 그만이었는데, 그 드라마 이후 내게 현빈(리정혁)은 드라마에서의 윤세리의 표현을 빌리면 '나의 최애'가 되었다. 수려한 외모에 부드러운 목소리, 첫 연애의 설렘을 그대로 보여줄뿐더러 강직하고 고집스러운 신념까지 갖춘 바람직한 남성의 표상처럼 다가왔고, 그의 연기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생각되었다. 이후 나는 전작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까지 소환하며 팬심을 더욱 키워왔고 그 마음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리정혁을 연기하며 그는 북한 역할 전문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었지만, 실제로는 북한 인물을 연기한 것은 단 두 작품이다. 영화 <공조>에서 과묵하지만 강한 집념을 지닌 북한 형사 '임철령' 역을 맡은 것과 <사랑의 불시착>. 그밖에도 재벌(하이드 지킬, 나), 임금(역린), 사장(시크릿 가든), PD(그들이 사는 세상), 사기꾼(꾼) 등 다양한 역할을 연기했다. <사랑의 불시착>에서 가슴 뛰게 하는 그의 연기가 어느 날 갑자기 완성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몸을 쓰는 강한 역할이 현빈에게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이번 드라마에서도 그랬지만, 영화 <협상>이나 <창궐>, <공조> 등에서의 연기가 그의 매력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다. 부드러운 외모에 운동신경까지 장착한 연기는 현빈만의 매력으로 차별화된 인물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실업 1년차의 실의와 절망을 내려놓게 만든 드라마

드라마를 보며 개인적으로는 실업 1년 차의 실의와 절망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드라마가 시작되었던 그해 3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직장을 그만두고 넘치는 시간을 열심히 배우며 꾸준히 무언가를 시도했지만 내게 맞는 적합한 자리는 없는 것 같았다. 무기력해지는 스스로에게 힘을 내라고 독려하고 싶었지만, 생각만 많아 지쳐가던 중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버린 상황은 사실상 퇴보를 의미하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가서 하루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자신감은 떨어졌고 자존감이 무너지던 때였다. 그때 만난 이 드라마로 일상생활에서의 긴장이나 조급함을 잠시 풀어놓았던 것 같다. 최선을 다해 살았으니 주말은 내가 원하는 것으로 즐겨도 되지 않을까란 생각도 했다. 드라마를 보며 하루하루의 정신적 피로와 한 주간의 마음고생을 털어버렸고 조금은 활기를 얻고 웃을 수 있었다.
 
 tvN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tvN <사랑의 불시착> 한 장면. ⓒ tvN

 
특히 남과 북을 오간다는 드라마의 설정은 인상적이었다. 남과 북의 갈등이나 대치보다는 북한 내의 권력 싸움, 같은 체재 내의 갈등에 주목하도록 했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문화콘텐츠지만 남과 북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기도 했던 것 같다.

남과 북의 이질적인 문화 차이도 잘 보여주었다. 생활 전반에 걸친 문화의 차이를 배우들의 코믹한 연기력으로 가볍게 넘기는 재치를 보여줬다. 북한의 장마당이나, 마을의 풍경,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상은 팩트에 주목하기보다는 가상의 설정이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했다. 때문에 대다수 시청자들이 북한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에 대해 금기시하거나 날을 세우지 않고 차이를 불편하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다.

같은 언어를 공유하지만 묘하게 이질적인 북한말도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귀때기', '에미나이', '후라이 까다', '찬물 미역', '손기척', '꼬부랑 국수', '차마당', '살까기' 등등의 말들은 생생하고 정확한 재현을 위해 다양한 계층과 연령의 탈북 주민을 취재한 결과라고 제작진은 밝혔다. 그 노력 덕분인지 생활과 밀접한 북한말이 이념처럼 차갑게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조연들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귀때기를 연기했던 배우 김영민(정만복 역)은 이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후 <부부의 세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킨 것 같다. 양경원(표치 수역) 배우의 힘 뺀 연기도 즐거움을 주었다. 배우 손예진(윤세리 역)과 주고받는 '티키타카'는 긴장감을 풀어주며 시청자들에게 웃음을 주었다. 

<사랑의 불시착>은 최종화 시청률이 22%에 육박하며 <도깨비>가 가지고 있던 기존 tvN 역대 시청률 1위 기록을 넘어섰다고 한다. 

마음이 맞는 드라마에 푹 빠지는 사람이지만, 현실을 망각하지는 않는다. 역사 드라마가 아니라면, 실제가 아닌 가공된 현실을 그린다고 해서 비판할 것도 없다. 드라마가 현실을 그대로 투영한다면 슬픔과 아픔, 비관 투성이일 테니. 드라마를 통해 현실을 잠시 돌려놓고 웃을 수 있고 다시 살아갈 긍정의 힘을 갖게 하는 것이, 내가 드라마를 보는 이유이고, 드라마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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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사람 사는 이야기를 씁니다. 50대 후반, 남은 시간을 고민하며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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