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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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백제 도읍이 한성(漢城)으로 불렸다는 사실이다. 한성은 말 그대로 하면 '한'의 성, '한'이 주재하는 성이다. 이 경우에도, 한(漢)이란 한자에 신경을 쓸 필요는 없다. 발음에 맞는 글자를 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백제인들은 어라하나 건질지에 더해 '한'과 비슷한 발음으로도 자기들 군주를 불렀다. 유목민 황제인 '칸'에 상응하는 지위를 백제 군주가 갖고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자료다.
고려는 요나라·금나라·몽골(원나라)에 사대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몽골에 사대한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기에, 고려는 한편으로는 최강국에 사대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제국의 면모를 잃지 않았다. 황제국의 전유물인 독자적 연호를 쓴 기간도 있다. 또 황제의 도읍을 지칭하는 경(京)이란 표현도 계속 사용했다.
모든 시대에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도읍 명칭 끝에 '경'이 붙으면 그곳에 최고의 군주가 산다는 의미였다. 고려 및 조선시대에 한자 경(京)은 황제나 칸 혹은 '한'이 사는 도읍을 뜻했다. 고려 수도는 개성이 아니라 개경이었다. 대외적으로 강대국에 사대한 기간 동안에도 고려 내부적으로는 황제국의 위상이 유지됐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상당히 심했다. 그런 중에도 군주의 공식 칭호는 왕이 아니라 주상(主上)이었다. 왕이란 용어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주로 죽은 왕의 시호에 사용됐다. 공식 명칭인 주상은 중국의 황상(皇上)보다는 약간 격이 떨어졌지만, 현대 중국의 주석(主席)보다는 약간 높은 개념이었다. 기독교의 '주(主)님'과 비교할 때도 밀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일부 사극에서는 조선 군주를 '국왕'으로 부른다. 국왕은 중원을 장악한 황제국이 제후국 군주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그것은 1등급 제후를 뜻하는 용어였다. 중국인들은 조선 군주를 그렇게 불렀지만, 조선인들은 자기들 군주를 주상이라는 고귀한 표현으로 불렸다.
한국 역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가치 있는 일, 하지만...
<더킹>을 비롯한 최근 십수 년간의 사극들이 한국을 황제국으로 묘사하는 일이 많은 것은, 그동안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던 이런 역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사관 등에 억눌려 제대로 발현되지 못한 한국 역사를 제자리에 올려놓는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다. 한국 역사 속의 황제국 면모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옳고 당연하지만, 황제국의 역사를 권장할 만한 역사로 지나치게 미화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국가들은 형식상의 국민주권국가에서 실질적인 국민주권국가로 변모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우에도, 정부 공직을 갖지 않은 일반 국민들이 국가 운영에 점점 더 많이 개입하고 있다.
이와 달리 옛날 국가들은 기본적으로 왕실의 나라였다. 이런 국가들의 운영 방식은 오늘날의 재벌기업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실이 백성을 대하는 시각도 재벌기업이 소비자를 대하는 시각과 유사했다. 자신들이 군대를 동원해 백성들의 생업을 보호하는 일종의 서비스를 제공하므로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세금을 내고 병역을 제공하는 게 마땅하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이런 시대에 왕실은 나라의 주(主)이고 백성은 객(客)이었다.
그 같은 구도 하에서는 왕실이 약하면 약할수록 백성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왕실이 백성을 수탈하는 구조가 존재했으므로, 왕실이 약하다는 것은 곧 백성들이 강하다는 뜻이었다.
왕실이 너무 강해져 황제 칭호를 쓸 정도까지 된다는 것은, 백성들이 더 많은 수탈을 당할 가능성이 생기게 됐음을 의미했다. 그렇게 되면 군주의 도읍은 한층 더 화려해지고 군주의 집도 한층 더 웅장해지기 쉬웠다. 군주의 사사로운 야심을 위해 백성들이 전쟁터에 동원될 가능성도 그만큼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실이 허약했던 시기는, 거꾸로 생각하면 민중이 그만큼 강했던 시기가 될 수도 있다. 백성들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에 왕실이 권위를 더 높이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다. 따라서 왕실이 허약해서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못한 것을 두고 현대인들이 안쓰러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대한제국보다는 대한민국이 낫다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SBS
과거에는 왕실과 국가가 역사 서술의 주체였다. 그래서 과거에 나온 역사서는 온통 다 그런 관점으로 서술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역사서에서는 군주가 황제 칭호를 써야 좋은 것이고, 군주의 권력이 저 산간벽지에까지 골고루 미치는 중앙집권화가 관철돼야 좋은 것이고, 백성들이 굶주려 폭동을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국가권력이 세금을 최대한 많이 거두는 것이 좋은 것이고, 군주의 영향력이 전쟁을 통해 외국 영토로까지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좋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의 관점이 아닌 왕실과 소수 지배층의 관점이 투영된 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옛날 역사서들이다.
지금의 인류가 지향해야 할 역사는 그런 역사가 아니다. 국가 지도자의 지위를 하늘 끝까지 올리는 역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지위를 하늘끝까지 올리는 역사가 현대 인류에게는 필요하다. 어느 한 명이 황제가 되어 신처럼 군림하는 역사는 미래 세상에서는 더 이상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이 점은 최근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황제국 이미지와 관련해서도 시사점을 던진다. 사료 속에 숨겨진 황제국의 역사를 찾아내 한국사의 진면모를 드러내는 것은 바람직하고 필요하지만, 황제국만이 이상적이고 위대한 국가였던 것처럼 미화하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모두가 우러름을 받지 않고 1인만이 우러름을 받는 세상은 인류 역사의 발전 방향과 명백히 배치되는 것이다.
<더킹>에는 대한민국과 대한제국이 각각의 우주에서 공존한다. 신라 국보인 만파식적만 갖고 있으면 두 우주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다. 만약 <더킹>에서처럼 2020년 현재까지도 우주 어디선가 대한제국이 존재한다면, 그건 너무도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정말로 그런 나라가 있다면, 만파식적을 훔쳐서라도 대한민국이 있는 우주로 건너오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도 문제점이 많은 나라이지만, 적어도 대한제국에 사는 것보다는 더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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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