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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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될 당시 단종은 김종서라는 거물급 중신의 후원을 받았다. 문신이지만 명장의 이미지를 가진 김종서가 단종 정권을 뒷받침했다. 김종서는 조정의 실권을 쥐고 다수파를 이끌었다.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최후에는 승자가 됐지만 쿠데타 전만 해도 김종서에 비해 열세였다. 그 정도로 김종서의 후원은 단종에게 큰 힘이었다.
그렇지만 단종 정권은 결국 무너졌다. 이는 김종서의 후원으로도 채울 수 없는 뭔가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 정권이 무너진 것은 김종서가 수양대군한테 목숨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종이 왕권을 잃은 것은 수양대군이 막강해졌기 때문도 아니었다. 순조와 헌종은 강력한 외척(왕실 사돈)의 기에 눌렸지만 왕권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군주보다 강력한 자가 있다고 해서 반드시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단종은 무엇 때문에 왕권을 빼앗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여성과 관련된 문제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중국과 달리 고대 한국과 일본에서는 여성 군주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여성의 정치적 위상이 꽤 높은 편이었다. 여성이 사제직을 수행하거나 사후에 신으로 격상된 사례들도 있다. 남성 군주가 없을 때는 여성이 대비 자격으로 비상대권을 행사하거나 수렴청정(대리통치)을 수행하기도 했다.
한국만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만백성의 아버지라 자처했다. 천명을 받아 인간과 우주를 양육하는 아버지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아버지가 있다면 당연히 어머니도 있을 수밖에 없다. 군주를 국부로 의제하는 전통은 또 다른 인물을 국모로 의제하는 전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 왕후가 바로 그 어머니 역할을 자처했다.
대통령 부인을 국모라고 부르는 사례도 있지만, 만백성의 어머니인 왕후의 지위는 대통령 부인과는 차원을 달리했다. 대통령 부인의 취임식은 없지만, 왕후의 취임식 즉 책봉식은 있었다. 군주의 즉위식과 별도로 왕후의 책봉식이 거행됐던 것이다. 왕후는 군주의 동반자였지만, 동시에 독립적 위상도 함께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여성 군주, 여성 제사장, 여성 신(神)의 전통이 강한 한국 사회에서, 왕후는 독자적 취임식을 거친 만백성의 어머니였다. 이 지위는 남편이 죽은 뒤에도 유지됐다. 남편이 죽으면 왕후의 위상은 오히려 강해졌다. 비상시에 신임 군주를 지정하기도 하고, 어린 군주를 대신해 수렴청정을 하기도 했다.
성종·명종·순조·헌종·고종 같은 어린 왕들이 왕위를 지킬 수 있었던 제도적 기반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왕후의 수렴청정이 그들을 지켜주는 기능을 했던 것이다.
단종의 왕권을 취약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
▲SBS 금토드라마 <더킹 : 영원의 군주>의 한 장면SBS
고종의 경우에도, 그를 법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익종(효명세자)의 부인인 신정왕후 조씨의 수렴청정이었다. 이 수렴청정을 근거로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했다. 고종의 최고 후견인은 신정왕후이고, 대원군은 신정왕후의 아래에 있었던 것이다. 만백성의 어머니인 왕후가 대비나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자격으로 이런 수렴청정을 했기 때문에, 어린 왕들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왕권을 안정적으로 지킬 수 있었다.
그 같은 왕후의 지위는 김종서의 권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늘로부터 위임받은 만백성의 어머니가 어린 군주를 후원하는 것은 수천·수만의 군대가 어린 군주를 경호하는 것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하늘에 대한 심리적 의존도가 훨씬 높았던 옛날 사회에서 그 같은 이미지는 쿠데타를 막는 데도 도움이 됐다. 하늘의 위임을 받은 국모가 어린 군주를 보호하는 모습은 백성들의 마음에 정치적 안정감을 심어줬다. 백성들이 그런 안정감을 느끼는 상황에서는 왕실에 대한 도전자들이 세를 규합하기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단종의 경우에는 그런 수렴청정을 해줄 여성 어른이 없었다. 단종의 할머니이자 세종의 부인인 소헌왕후 심씨도 세상을 떠난 뒤였고, 단종의 어머니이자 문종의 부인인 현덕왕후 권씨도 세상을 떠난 뒤였다. 이것이 단종의 왕권을 취약하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만약 수렴청정을 해줄 대비가 있었다면, 수양대군이 김종서를 함부로 죽이지도 못했을 것이다. 대비까지 없애는 패륜을 범하지 않는 한, 그런 상황에서 수양대군이 단종을 무력화시킬 길은 없었다.
이처럼 어린 군주를 보호하는 힘은 남성 종친이 아니라 여성 대비한테서 나왔다. 이런 구도가 안타깝게도 <더킹>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쿠데타로 아버지를 잃은 어린 황태자가 오촌당숙과 상궁의 도움으로 지위를 유지하는 모습은 물론 100%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한국 역사에서는 일반적이지 않다. 평행하는 또 다른 우주에서라면 몰라도, 이 우주 속의 한국 역사에서는 개연성이 매우 낮은 설정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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