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
Columbia Pictures Corpora
단순한 호감의 대상이었던 PD 리타를 유혹하는 것으로 하루의 목적을 바꾼 필은 인내심 있게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하는데, 하루하루 그녀에 대해 알아 갈수록 그는 그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닌 목적을 취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녀가 좋아하는 프랑스 시를 외고, 그녀가 좋아할 법한 말들을 내뱉는 것은 결정적인 순간에 들통이 나버리고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항상 실패한다.
이제 필은 거짓 연기를 포기하고,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살아가고자 한다. 자기밖에 몰랐던 그는 마을 사람들을 도우며 자기도 모르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해가고, 그를 향한 반감의 시선은 호감으로 변해간다. 사랑의 감정은 자연스럽게 리타에게도 스며들고, 필은 진실된 사랑으로 제 그림자에서 벗어나게 된다.
'만약 당신이 내일이 없는 오늘을 산다면?'하고 필은 질문을 던지는데, 누구나 한번쯤은 해봤을만한 질문이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무책임한 일탈이 아니라 하루하루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상이라고 영화는 대답한다.
빌 머레이의 시니컬하면서도 끝에는 따뜻함을 남기는 연기와 리타 역을 맡은 앤디 맥도웰의 아름다운 미소가 인상적인 <사랑의 블랙홀>은 25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고, 여전히 재미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한 장면.Columbia Pictures Corpora
로맨틱 코미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보아야 할 <사랑의 블랙홀>은 빌 머레이라는 배우의 진가를 볼 수 있는 영화로 그의 시작점과 지금을 이어주는 중요한 영화다. 멜랑콜리와 유쾌함이 결합된 빌 머레이의 연기는 웨스 앤더슨 감독의 1998년 <맥스 군, 사랑에 빠지다>을 지나며 그 색이 진해지고, 2003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지나며 섬세함이 더해져서 오늘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그만의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한다.
실생활에서도 괴짜인 걸로 유명한 그는 웨스 앤더슨과 짐 자무쉬의 지속적인 애정을 받아 오고 있는데 그것은 세상을 대하는 느긋함이 담긴 그의 연기가 그들의 작품과 결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심드렁한 얼굴에서 아무리 세상 복잡하고 힘든 일도 언젠가는 다 지나갈 거라는 위로를 읽는다. 그런 힘을 가진 배우는 흔치 않다. 아무쪼록 더 많은 영화에서 오래도록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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