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한 장면
화인커뮤니케이션
술집에서 알게 된 일본인 형제를 따라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일본 홋카이도 유바리로 여행을 떠난 비키는 90세 생일을 맞이한 형제의 할머니를 만난다. 할머니는 100살이 넘어서까지 살고 싶다고, 그래서 유바리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 보고 싶다고 말하는데, 영화 속에서 보이는 유바리는 90세 노파만큼이나 노쇠한 모습이다. 마을에서 열리는 영화축제는 축제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고요하고, 극장에 붙은 옛날식 포스터는 감흥 없는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뿐이다. 온통 눈으로 뒤덮인 그곳에서 비키는 대만에서의 문제들을 잊고 환하게 웃지만 하얀 눈이 과거의 마을을 뒤덮고 있듯이 비키의 문제들은 잠시 가려져 있을 뿐, 짧은 여행이 끝나고 그녀는 과거의 진행형인 현재로 돌아온다.
20세기를 지나 21세기를 맞이하면서 모두들 새로운 시작과 변화를 기대하지만 21세기가 되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고, 사람들은 여전히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막막하다. 비키는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야쿠자 중간 보스 잭(고첩)에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한 미래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고, 잭은 그녀가 호스티스 일을 그만두고, 하오하오를 떠날 수 있도록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준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만의 문제가 있고, 그 역시 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있어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비키는 갑작스럽게 일본으로 떠난 잭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가서 그를 기다리지만 그녀는 그를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한다. 그녀는 말한다. 이 모든 일들은 2001년, 십년 전에 있었던 일이라고.
▲영화의 한 장면화인커뮤니케이션
한발 짝 멀리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인물들을 쫓는 카메라의 움직임과 림기옹의 전자음악은 영화의 리듬과 호흡을 같이하며 청춘의 무기력함을 잘 표현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서기의 연기 또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밝고 명랑한 비키의 공허한 이면을 잘 그려내고 있다.
결국 배우는 어떤 작품을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그의 가치가 결정된다. 장만옥이 왕가위 감독을 만나면서 그녀의 커리어가 확장되었던 것처럼, 서기 역시 허우 샤오시엔 감독을 만나면서 그녀가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한 것을 알 수 있다(상이 그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기는 <밀레니엄 맘보>와 허우 샤오시엔 감독과 함께 한 두 번째 영화 <쓰리 타임즈>로 대만 금마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국제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개인적인 취향일 순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허우 샤오시엔 감독의 영화 안에서 서기의 매력과 연기가 가장 아름답게 빛났다고 생각한다. 그녀에게는 사람의 시선을 주목시키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으로 모델이 되고 배우가 되고 스타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언젠가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이제 그녀는 그 시선들을 영화 안으로 잡아당기는 배우가 된 것 같다.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터널을 지나는 비키의 뒷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과연 그녀는 세월의 터널을 지나 그때의 혼돈에서 벗어났을까? 혹은 지금의 혼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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