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트바쉬>의 한 장면. 주인공 야젝과 그의 연인.
부산국제영화제
부모와 형제자매는 그가 새로운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한다. 가톨릭 교회 역시 그를 위해 기도하고 금전적으로도 돕는다. 그러나 주인공의 시련은 그칠 줄 모른다. 동네의 철없는 아이들은 그를 '괴물'이라 놀리고 늘 가까이 지내던 동네 사람들은 전혀 다른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대한다. TV 출연을 계기로 잠시 화장품 회사 광고 모델이 되기도 했지만, 결국 직장은 갖지 못한다. 무엇보다 누나의 애타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야첵의 연인은 종내 그의 곁을 떠난다. 나중에는 어머니조차 "내 아들이 아니다. 다른 사람 같다"고 신부에게 고백한다. 말하자면 마귀가 들지 않았냐는 것이다.
한심한 신부는 퇴마사를 불러 야첵의 몸에서 마귀를 끄집어내는 의식을 강행한다. 야첵이 참다 못해 "다들 미쳤어요?" 일갈하는 장면은 통쾌한 일장 희극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장면은 단지 얼굴과 목소리가 좀 (혹은 심하게) 달라졌을 뿐인 야첵 앞에서 주위 사람들이 겪게 된 혼란의 심각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야첵이 고향 땅을 떠나기 위해 버스에 오르는 걸로 끝난다. 수많은 환난의 시간을 묵묵히 견뎌온 그였다. "야첵, 내게 넌 이전과 그대로야." 부활절 동네 축제 때 한 노인은 그에게 이렇게 한 마디 했다. 그것은 고립무원의 야첵이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으리라. 하지만 그 노인도, 헌신적이었던 누나도, 연인과의 사랑의 추억도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야첵에겐 소중하긴 해도 비누방울처럼 가벼운 위안에 불과한 것이 되지 않았을까? 이제 그는 어제의 야첵이 아닌 것이다.
▲영화 <트바쉬>의 한 장면.부산국제영화제
<얼굴>은 야첵의 흉하게 변해 버린 얼굴을 통해 수많은 다른 얼굴들을 보여준다.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의 얼굴, 폴란드 인을 바라보는 다른 유럽인의 얼굴, 집시를 바라보는 집시 아닌 사람들의 얼굴, 장애인을 바라보는 비장애인의 얼굴,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는 신자들의 얼굴들까지. 요컨대 야첵의 변모한 얼굴이라는 '거울'에 비친 인간 군상들의 내면의 얼굴들 말이다. 거기에는 기만의 얼굴도 있고, 혼란의 얼굴이 있으며, 어쩔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는 얼굴도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화면을 가득 채운, 그 모든 얼굴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거대한 예수의 얼굴까지.
사람은 단 하나의 얼굴로 살아갈까? 두 얼굴이든 천의 얼굴이든 여러 얼굴로 살아가지 않을까? 이를테면 천사 앞에서는 천사의 얼굴로, 악마 앞에서는 악마의 얼굴로,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겐 편한 얼굴로, 나를 적대하는 사람에겐 긴장된 얼굴로 말이다. 하나의 얼굴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직하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영화가 끝나자 나는 내게 묻고 있었다. "나의 진짜 얼굴은 뭐지?" 그러는 내게 영화는 또한 이렇게 물었다. "야첵은 야첵의 길을 갈 것이다. 그럼 지금 당신의 얼굴은 어떤가?" 조금은 섬뜩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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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오랫동안 고교 교사로 일했다. <교사를 위한 변명-전교조 스무해의 비망록>, <윤지형의 교사탐구 시리즈>, <선생님과 함께 읽는 이상>, <인간의 교사로 살다>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