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킬링> 스틸컷영화 <킬링>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03.
한편, 모쿠노신에게 끊임없이 대련을 신청하는 어린 이치스케에게는 자신이 농민의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는 계급에서 비롯된 열등감이 있다. 이치스케 역시 실력이 모자라지는 않으나 농민의 계급을 갖고 태어난 이는 결코 사무라이가 될 수 없는 신분의 한계 때문에 남들보다 훨씬 더 높은 능력을 갖기 위해, 또 자신의 열등감을 지우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행동은 조급함이 되어 스스로의 명을 단축하는 계기가 된다. 마을을 찾아온 무법자 패거리들에 의해 그 열등감이 건드려지자 참지 못하고 마는 것. 그 또한 모쿠노신을 찾아온 사와무라로부터 재능을 인정받기는 하였으나, 실전 경험으로 단련이 된 패거리들의 실력에는 역부족일 수 밖에 없었으며 호되게 당하고 만다.
04.
이 지점부터 영화는 실력 좋은 무사들이 전국 시대를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이끌기 위해 뜻을 뭉쳐 의롭게 일어서는 내용이 아닌, 복수가 복수를 낳고, 그 복수로 인해 모두가 공멸하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당하고 돌아 온 이치스케의 모습을 보고 이에 대한 복수를 만류하는 모쿠노신과 장차 자신의 동료가 될 자의 아픔에 대한 복수를 준비하는 사와무라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외적 갈등을 형성하는 계기가 된다.
결국 복수에 나선 사와무라는 무법자 패거리들을 처단하는 과정에서 무리 중 한 명을 놓치게 되고, 달아난 자는 또 다른 무리들을 이끌고 마을로 돌아와 이치스케와 그의 부모를 모두 죽이고 만다.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은 전형적인 비극이다. 어느 쪽이 먼저인가를 논하기에는 일이 이미 너무 커져 버렸고, 그 결과가 참혹하기만 하다. 이쯤 되면 양 쪽 모두 남은 자들의 사정은 마찬가지. 자신이 잃은 것보다 더 큰 상처를 상대에게 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시기는 그런 시기였다. 사람이 사람을 베고, 피를 피로서 갚는 시기.
05.
이 과정에서 사와무라는 주인공이 갖고 있던 딜레마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그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동생을 포함한 가족 모두를 잃은 유를 이용한다. 하지만, 모쿠노신은 유가 패거리들에 의해 겁탈을 당하는 장면을 보고서도 검을 집어 들지 못한다. 과연 그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모쿠노신과 유가 영화의 초반부에서 감각적인 장면을 통해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던 점을 고려하면, 그의 트라우마가 결코 가벼운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이 사와무라에 의해 정리가 되고 난 후에 그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이렇게 절규한다. '나도 사람을 벨 수 있게 되고 싶습니다. 나도 사람을 벨 수 있게 되고 싶습니다.' 목검을 들고는 최고의 검술을 보여주는 검객이 한다고는 상상하기 힘든 말이 아닐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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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향해 칼을 들지 않을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시대라면 살검과 활검, 즉 사람을 살리기 위해 칼을 드는 것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칼을 드는 것을 구분할 줄 알고 적절한 때에 쓸 줄 아는 것이 차선의 방법일 것이다. 사와무라와 모쿠노신의 근본적인 차이는 여기에 있다. 활검을 들 수 있는 사와무라와 그렇지 못한 모쿠노신. 그렇다고 해서 사와무라가 언제나 사람을 살리기 위해 검을 쓰느냐 아니냐에 대한 문제는 여기서 논하지 않도록 하겠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모쿠노신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 유를 이용하는 모습도 보이는 자다.
자신이 사랑하는 자의 위급한 상황을 타개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마음이 붕괴되어 진검을 들 수 없는 사무라이가 전장에 나간다고 한들 제 몸 하나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사와무라가 모쿠노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다. 자신보다 강한 상대에 의해 사무라이의 명예로운 죽음을 얻는 것과 동시에 모쿠노신이 전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계기가 자신의 죽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
07.
동생 이치스케의 복수를 원하던 유가 마지막에는 그만하라며 절규하는 모습은 어쩐지 모쿠노신 또한 과거에 그런 유사한 경험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복수에만 눈이 멀어 다른 것들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이 복수가 낳은 절망적인 결과를 마주하고 이내 모든 것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게 남은 것만이라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마음과 함께. 진검을 쥐고 두 손을 벌벌 떨던 모쿠노신, 오프닝의 그 장면이 과거 그의 상황을 암시하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08.
기존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라면 이 영화의 시작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매끄럽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절제된 표현들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와무라가 처음 발도(拔刀)하는 장면에서 전해지는 극도의 긴장감과 잔혹하지만 압도될 수 밖에 없는 무법자 무리와의 대결 장면만으로 이 작품의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번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관금붕 감독의 <초연>과 장률 감독의 <군산 : 거위를 노래하다>와 함께 세 편의 갈라 프레젠테이션에 선정되기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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