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풀잎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모습
신진화
김민희를 만나다, 우연히
실은 그녀를 한번 꼭 만나보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게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이니까. 우리는 아는 사이가 아니지만 내가 아주 못 났을 때, 그래도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을 거라고 내 스스로 다짐할 때, 나는 그녀를 보면서 버틸 수 있었다.
6년 전인 2012년, 영화 <화차>가 개봉했을 당시 나는 대학원 신입생이었다. 학부 졸업 후, 잠시 회사를 다녔다. 돈을 모으고 회사를 그만둔 뒤, 다시 내 길을 가겠다고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러나 4년이란 공백은 너무나도 컸다. 전공은 다 까먹었을 뿐더러, 공부하는 방법도 영어도 다 잊었다.
수업을 따라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대학원 수업은 논문을 스스로 읽고 소화해 발표하는 식이다. 하지만 나는 논문을 읽어낼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국 대학원 첫 수업, 어렵게 준비해 간 수업시간에 잘못된 내용을 전달해버렸다. 그리고 이어진 교수님의 한마디.
"야, 거짓말 하지 마."
좌절 한 번 안 해봤을 학교 친구들 앞에서 나는 '사기꾼'이 되었다. 내가 영어를 못해서 저렇게 됐다는 소문이 학교 안에 쫙 퍼졌다. 공부 잘한다는 애들 사이에서 영어 하나 못 읽는 무능력자로 있는 건 참으로 벅찬 일이었다. 내 적성이라고 찾아온 이 길에서 영어가 안 돼 연구를 할 수 없는 내 상태가 한심했다.
회사를 그만 둘 때, 누군가 말했다. '회사 한 번 그만두는 사람들, 자주 그만둔다. 그거 습관 된다.' 너도 그런 사람일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충고였다. 첫 발표를 마치고 그의 조언이 계속 생각났다. 그의 말을 들었을 당시엔 '그런 거 아닌데, 난 인내심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 길을 찾아서 떠나는 건데'라는 말도 못했는데 말이다.
▲2017년 67회 베를린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김민희의 모습베를린국제영화제
김민희가 극복한 길, 나도
그때 우연히 배우 김민희가 출연한 <피플 인사이드>를 봤다. 10여 년 전 연기력 논란으로 연예계를 떠날 뻔했던 김민희가 무서운 연기력으로 <화차>라는 영화를 가지고 나온 직후였다. 그때 그녀의 성장을 보면서 견뎠다. 그래도 김민희는 전 국민 앞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날 것으로 보여줘야 했지만, 난 단지 10명이 채 안 되는 친구들 앞에서 쪽팔린 거니까. 나도 그녀처럼 10년이 지나면 어떻게 달라질지 모른다며 위안했다. <화차> 때 보여준 그녀의 연기에서 10년 전 연기력 논란에 휩싸였던 미성숙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나도 그녀처럼 10년 뒤 내 재능이 발휘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베를린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계속 멋있는 연기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당신 덕분에 나도 이렇게까지 왔다고, 당신이 더 잘 되면 나도 힘을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러나 그 말을 전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의 사인 요청에 영화관 안을 두려운 눈으로 두리번거리더니 황급히 이름 석 자를 흘려 쓰고 사라졌다. 급히 쓴 이름 석 자는 정말 나만 알아볼 수 있을 수준의 사인이었다.
6년 전 영어 때문에 좌절했던 나는 아직도 연구를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머물고 있다. 여전히 영어 때문에 논문이 이해가 안 돼 학계를 떠나고 싶을 때도 많다. 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논문을 써야 하는데 언어 장벽으로 하루 몇 줄 밖에 못 쓰고 있을 때 이게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그래도 연기력 논란을 겪었던 한 배우가 <화차>라는 영화를 거쳐 세계 3대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그 순간을 떠올리며 오늘도 견딘다.
그녀를 홍상수 감독의 영화뿐만 아니라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고 싶다. 오랜 팬으로서 그때가 오기를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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