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의 생일날. 아빠가 오기를 기다리지만 밤이 늦도록 오질 않고, 엄마 지숙은 홀로 어둠 속에서 쓸쓸하게 남편을 기다린다.
부산국제영화제
휘청거리며 집으로 가던 현태는 골목길 안쪽에서 빛나는 술집 간판을 보고 또 술을 마신다. 만취하여 걷다보니 미처 오던 차를 발견하지 못해 재수 없게 부딪혔다. 주섬주섬 일어나 운전자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집으로 걸어간다. 취기 탓인지 쉬고 싶다. 힘든 하루다. 마침 의자가 보인다.
은혜(이상희)는 우울증으로 약을 먹는다. 전업주부인 그는 이른바 '독박육아'를 하는 중이다. 아기는 툭하면 울어대서 도통 밤에 편히 잠을 잘 수 없고 식욕마저 없어진지 오래다. 아기가 간밤에 너무 울어서 '어디 아픈가' 싶어 오늘은 아기를 병원에 데려가려 한다. 그런데 남편 준석은 출근길에 "오늘 꼭 은행에 가서 부동산 거래금을 입금하라"고 하더니 회사에서도 전화해서 재촉한다. 자는 아이 옆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
얼른 준비해서 은행에 가려는데 경비 아저씨가 말을 건다. 요새 통 얼굴이 안보이길래 친정에 간 줄 알았다느니 주절주절 늘어놓는다. 다행히 병원에 가니 아기는 괜찮다고 한다. 엄마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은행 업무 마감까지 얼마 남질 않았건만 누가 주차한 자가용 앞에 차를 세워두었다. 연락처로 전화해서 간신히 차를 빼서 은행으로 간다. 허둥지둥 은행 앞 도로에 주차했다. 아기는 잠도 자니 그냥 차에 두고 얼른 일 봐야지. 소변도 마렵다.
지숙(조시내)은 아들의 안과 진찰이 끝난 후 점심으로 패스트푸드를 먹고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 다친 팔의 깁스를 풀기 위해 의료원으로 향했다. 진찰을 기다리는데 아기를 안은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는데 어째 쌀쌀맞다.
깁스를 풀자마자 그녀는 아들의 생일상 차릴 돈을 벌기 위해 그간 다쳐서 몇 달 쉬었던 식당에 간다. 아직 조심해야 하지만 다시 일거리를 잡아야 하니 잽싸게 테이블을 치우고 설거지도 했다. 일당으로 마트에서 장을 봐서 저녁을 차리고 기다리건만 남편이 도통 오질 않는다. 결국 아들과 단둘이 그냥 저녁을 먹는다.
영준(김현빈)은 병원에 다녀오느라 뒤늦게 등교를 했다. 친구들이 안경을 뺏으며 장난을 친다. 난독증으로 글씨가 잘 보이지 않으니 자꾸 책을 더 가까이 두고 보게 된다. 내일 낭독 연습도 해야 하는데.
어차피 소화해야 할 삶, 궁지에 몰린 마음도 씹어야 한다
▲영화 <물 속에서 숨쉬는법> 후반부에 나오는 장면. 은혜는 갑작스런 사고에 망연자실 한다.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가족을 죽음의 길로 인도한 견인업체 직원은 뒤에서 그저 바라볼 뿐이다.부산국제영화제
하굣길에 은행 앞을 지나가는데 어떤 아저씨가 전봇대에 서류 한 장을 부착하는 것이 보인다. 서류를 떼어서 뭐라 적혀 있나 읽어 보며 가는데 어떤 여자와 부딪혔다. 여자는 정신없어 보인다.
견인업체 직원은 은행 앞에 무단으로 주차된 차가 있기에 안내문을 전봇대에 부착해 두고 견인할 준비를 했다. 길을 가던 안경 낀 남학생 하나가 멈춰서 전봇대에 다가가 안내문을 본다. 그 모습에 슬쩍 관심을 두었으나 어서 일을 해야 한다. 해도 짧으니. 차를 견인해서 회사에 보니 벌써 하늘은 깜깜하다.
극중에서 영준이 학교에서 더듬더듬 시를 낭송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등장하는 시는 천양희 시인의 <밥>이다.
"외로워서 밥을 많이 먹는다던 너에게
권태로워 잠을 많이 잔다던 너에게
슬퍼서 많이 운다던 너에게
나는 쓴다
궁지에 몰린 마음을 밥처럼 씹어라
어차피 삶은 너가 소화해야 할 것이니까" - 천양희 <밥> 중에서
영화 속 인물들은 이 시적 자아처럼 다들 궁지에 몰리게 되고,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아등바등 투쟁한다. 하지만 삶은 그들 각자에게 모두 깊은 절망감만을 안겨 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갈등의 씨앗은 기껏 종이 두 장에 불과할 뿐이다.
정리해고와 차량 견인 안내문의 끝은 두 가족 구성원 중 각각 한 명의 죽음을 낳는다. 그리고 전투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병원에서 또다시 상대 가족과 마주치지만 여전히 누구인지 서로 알지 못한다. 마치 난독증에 걸려 글자를 보고도 읽지 못하는 영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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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어로 '좋아할, 호', '낭만, 랑',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이'를 써서 호랑이. 호랑이띠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