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뇽팬픽은 수위가 높기로 유명하다.
이정진
에라 모르겠다앨범과 포스터, 각종 굿즈를 압수당했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 "예 처형, 저 정진 아빠예요. 점심 드셨어요?" 작은 이모였다. 뒤이어 믿고 싶지 않은 말이 계속해서 들렸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민서 컴퓨터에 '탑뇽'이라는 파일 있으면 삭제해주시겠어요? 그게 애들이 뭐 빅뱅 관련해서 다운 받은 거라던데 내용이 좀 이상해서요." 민서는 최후의 보루였다. 혹시라도 자료가 날아갈 경우에 대비해 진짜 소중한 자료를 서로의 컴퓨터에 복사해뒀다. "예, 예. 민서한텐 굳이 말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다음 명절 때 뵙겠습니다." 미안해 민서야, 언니가 나중에 설명할게.
마음의 준비도 못 하고 헤어진 자료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을까. 가슴으로 한 번, 눈으로 두 번 울면서 다짐했다. 기필코 내 노트북을 사겠다고. 온갖 팬픽을 다운받아서 바탕화면에 깔아놓겠다고.
인생 최대의 위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용 노트북은 무려 6년이 지난 뒤에야 가질 수 있었다. '20살 대학입학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10년 동안 부지런히 읽었지만, 아직도 못 읽은 팬픽이 많았다.
▲노트북이 생겼다. 이제 안전하다.이정진
천국
새로운 아이돌의 등장으로 가요계가 재편되듯, 팬픽도 마찬가지다. 최근엔 팬픽을 다운받는 것과 별개로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를 찾아다닌다. 회원가입 후에 구독알림을 설정하면 새로운 글을 바로 받아볼 수 있다. 소재도 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어제 읽은 '타임버스'는 서로의 파트너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손목에 적힌 숫자가 1씩 늘거나 줄어든다는 설정이었다.
팬픽은 더 이상 좋아하는 가수가 서로 사랑에 빠지기만 하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개성 강한 2차 창작물, 색다른 시도가 반복해서 이뤄지는 새로운 문화다. 이를 싸잡아 '단순 망상'이라고 칭하는 것은 팬픽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된다.
우리에게 팬픽은 '내 가수를 좋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팬픽을 쓰고 읽는다. 가수를 향한 마음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속상하고 슬픈 게 팬인 걸 어쩌겠는가. 팬픽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 자고로 덕후는 무작정 두근거리는 마음을 일단 쏟아내는 존재다.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좋으니까 읽는다.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행위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3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