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이끌 지도자가 가져야 할 덕목은 무엇일까요? 오마이스타는 드라마와 영화 등을 통해 '리더의 조건'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영화 눈길 포스터

영화 눈길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학교에 다니던 부잣집 딸 영애와 많이 배우지 못한 가난한 집 딸 종분, 한 마을에서 다른 환경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전쟁의 그림자는 두 사람 삶을 바꿔 놓는다. 한 사람은 자신의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후방 지원에 나선 것이었다면, 한 사람은 어둠 속 집으로 들어선 낯선 사람들에게 납치당한 것이었다. 둘이 재회한 곳은 기차 안. 도착한 곳은 처음 예상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이었고, 험난한 운명의 시작이었다.

일본군의 성노예로 유린당하는 삶. 사는 게 고통이자 치욕이었지만 쉽게 죽을 수도 없는 곳. 아픔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던 그 곳에서 생과 사가 갈렸지만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했지만 그 고통은 평생을 이고 가야 할 멍에나 다름없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눈길>은 두 소녀가 당한 아픔과 치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비추는 영화다. 비슷한 소재를 다룬 여타 다른 영화들과는 달리 자극적이지 않게 만들어졌지만, 그 고통만큼은 가볍게 다가오지 않는다.

<눈길>의 두 소녀가 기차에 실려 강제로 끌려갔던 만주 땅 무단장(목단강). 당시 동만주의 거점으로서 일본의 다양한 회사와 공장이 진출한 도시였고, 관동군의 기지가 있던 곳이었다. 산악지대는 중국인이나 조선인 항일 부대의 활동 공간이기도 했다. 그 곳에서 소녀들은 생지옥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지도에서 찾아보니 북쪽의 우리 땅과 직선거리로 200km 남짓했다. 요즘은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2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곳이지만, 탈출해 걸어서 고향까지 돌아오는 데는 1년의 시간이 걸려야 했다. 간신히 집에 도착했어도 가족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졌고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이상한 소문이 퍼지며 사람들은 수군거렸고 고향 땅도 편하지 않았다. 상처를 감추고 홀로 살아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백성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무능한 군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눈길>은 두 소녀가 당한 아픔과 치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비추는 영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영화 <눈길>은 두 소녀가 당한 아픔과 치욕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비추는 영화다. ⓒ (주)엣나인필름


<눈길>의 시간적 배경은 식민지배가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지만, 눈길을 돌려 지나온 역사를 살펴보면 안타깝게도 되풀이되고 있는 역사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임진왜란은 일본의 침략에 국토가 유린당한 엄청난 희생이 따랐던 아픔의 시간이었다. 병자년과 정묘년의 난리는 또 어땠는가? 힘없는 나라는 외세에 짓밟혔고, 백성들은 온갖 고통을 떠안으며 비통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조공처럼 끌려갔던 여인들 중 일부는 겨우 목숨 부지해 살아 돌아왔지만 도리어 손가락질을 감내해야만 했다.

<눈길>의 시대보다 더 오랜 옛날 일어났던 아픔이었으나, 몇 백 년이 흘러 또 다시 비슷한 일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역사적 아픔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언제든 되풀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눈길>은 일본군 위안부로 살았던 분들에 대한 아픔과 위로를 강조하면서,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던 비애 역시 상기시킨다. 총칼을 앞세운 일본에게 강압적으로 끌려가는 청년들, 항일운동을 하고 있는 가족으로 인해 학교에서도 어려움을 당해 정신대를 자원하는 일 등등. 일제 식민지를 배경으로 하는 많은 영화들이 그러하듯 민초들의 사례를 통해 지나간 역사의 아픔을 기억하게 만든다.

그렇다고 당시 상황에 대한 분노로만 끝난다면 영화가 말하려는 의미를 일부분만 받아들이는 셈이 된다. <눈길>에서 보이는 소녀들의 아픔은 좀 더 깊이 근원을 따져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시대를 잘못 만났다는 자조와 개인의 아픔으로만 치부할 성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외적으로 볼 때 소녀들에게 고통을 안긴 바탕은 국권을 침탈당했던 국가 지도자들의 무능이었다. 조선 중기 왜란이나 호란도 지혜는 부족하고 무능함만 있던 군주가 빚어낸 참사였다. 닥쳐올 국난을 미리 대비하지 못했고 빠르게 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한 혜안도 없었다. 난리가 났을 때 권력의 자리에 있던 이들은 도망이나 다녔을 뿐, 모든 고통은 <눈길>의 소녀들처럼 민중들의 몫이었다.

무능한 군주 밑에서 간신배들은 나라 팔아먹는 일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매국의 대가로 자자손손 부를 향유했고, 민중의 아픔은 외면했다. 자신들의 안위만 챙겼던 민족반역자들과 그 후손들이 청산되지 않은 채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것이 소녀들이 당한 아픔만큼이나 치욕스럽게 이어져 오고 있는 역사의 단면이다.

눈물을 쏟게 할 것인가, 위로할 것인가?

 부산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총영사관 일장기를 바라보고 있다.

부산 평화의 소녀상이 일본총영사관 일장기를 바라보고 있다. ⓒ 윤성효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눈길>은 이 경구를 더욱 깊이 각인시키는 영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영화에서 느꼈던 울분을 되풀이하게 만든다. 꽃다운 소녀들이 겪은 고통을 잊게 하고 망각시키려는 시도가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권력의 자리에 앉은 자들을 통해서.

지난 3.1절 기념식에서 황교안 총리는 많은 국민이 굴욕적이라고 규정한 위안부 합의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해 위안부 할머니들의 가슴에 또 한 번 못을 박았다. 잘못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없이 돈 몇 푼으로 끝내겠다는 일본의 태도에 외교적 합의라는 이유로 동조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마치 나라를 팔아먹고도 당당했던 친일파의 모습이 연상될 정도다.

일본의 돈으로 만들어진 재단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회유를 통해 돈을 주려 하기도 했다. 이 역시도 감언이설로 어린 소녀들을 성노예로 끌고 갔던 일제의 간교함과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일제에 빌붙어 이익을 챙겼던 모리배들의 재등장으로 여겨질 정도다.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세워진 소녀상에 대해 일본 외무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는 한국 외교부의 태도와 그 소녀상 옆에 쓰레기를 갖다놓는 몰지각한 행태도 마찬가지다. 고통 받았던 위안부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 주기는커녕 더 쏟게 만드는 짓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영화 <눈길>의 한 장면

<눈길>은 일본군 위안부로 살았던 분들에 대한 아픔과 위로를 강조하면서, 나라 잃은 식민지 백성이 겪어야 했던 비애 역시 상기시킨다. ⓒ (주)엣나인필름


이제는 할머니가 된 <눈길>의 소녀들의 모습은 정치가 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꽃다운 소녀들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능욕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가족의 품안에서 평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고 지도자의 모습이다.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것이냐, 아니면 계속 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이 될 것이냐? <눈길>이 시대에 묻는 질문이다.

눈길 영화 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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