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2년 6월 21일 오전 서울 여의도 MBC 사옥 남문 앞에서 열린 김재철 사장 규탄 집회에 최승호 PD가 참석해 자신의 부당한 해고에 대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유성호
우리는 대부분의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가끔 힘센 놈들에게 굴복해서 뉴스를 망치려는 간부들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들도 부끄러움은 아는 선배들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이제 그만 뉴스를 더럽히고 물러나라' 하면서 성명을 발표하거나 농성을 하면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나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MBC 뉴스는 위기를 넘기고 다시 국민의 사랑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2012년, 그대들이 입사하기 1년 전, 다시 큰 싸움이 시작됐습니다. 진짜 센 놈들이 정권 재창출을 위해 방송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무려 6개월이나 파업을 하면서 처절하게 버텼습니다. MBC 역사에서 가장 악랄했던 낙하산 사장과 간부들은 저항하는 우리를 빨갱이, 좌파로 몰아붙였습니다. 대선을 앞둔 정치권도 우리를 외면했습니다. 결국 우리는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싸우던 언론인들은 회사에서 쫓겨나고 남은 이들도 마이크와 카메라를 빼앗겼죠. 그리고 MBC 뉴스는 철저하게 망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시청자들은 약자의 편에 서지 않고 강자에게 굴복한 뉴스를 금방 구분하더군요.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에서 힘센 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방송, 국민들이 가장 사랑해 주던 방송, 대학생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어 했던 방송은 언제부턴가 욕설과 손가락질을 받는 방송으로 전락했습니다. MBC 기자들은 순식간에 '기레기'의 대명사가 됐더군요. 그 와중에 그대들이 MBC에 입사한 겁니다.
MBC가 이렇게 된 건 못난 선배들 탓입니다
곽동건, 이덕영, 전예지 기자.
촛불집회에서 시민들이 MBC 기자들에게 "짖어봐"하며 조롱했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찢어지고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MBC 로고를 마이크에서 떼어내고, 골목에 숨어서 방송하는 게 부끄럽고 수치스럽겠지만 절대 죄책감은 갖지 마세요. MBC가 이렇게 된 건 그대들 탓이 아니니까. MBC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비극은 다 우리 선배들 탓입니다. 권력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뿔뿔이 흩어져 이제는 아무 힘이 없는, 그래서 막내 후배들에게 소주 한 잔 따라 주며 '기자는 힘센 놈들과 싸워야 된다'고 가르치지도 못하는, 못난 선배들 탓입니다.
요즘 제게 MBC가 예전의 사랑받던 방송으로 돌아갈 수 있겠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쉽지 않을 거라고 대답했습니다. 뼈를 깎고 살을 도려내는 반성과 개혁이 있어도 회생의 불꽃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무릎 꿇은 건 아니었지만 굴종의 세월이 점점 길어지면서 젊은 기자들의 피도 차갑게 식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들이 만든 동영상을 보고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권력과 맞서 본 경험도 없고 이끌어 줄 선배도 없었던 막내들이, 힘내서 싸울 수 있도록 더 MBC를 욕해달라고 호소하는 걸 보고 가슴에서 뭔가가 꿈틀거리더군요. 가장 어두운 상황에서 그대들이 한 줄기 빛을 던져줬습니다. 저런 후배들과 함께라면 MBC 뉴스를 다시 살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강해졌습니다. 그대들의 뜨거운 목소리는 지금 이 순간, 패배주의로 얼어붙은 선배들의 가슴을 녹이고 있을 겁니다. 다들 똑같은 심정일 겁니다. 틀림없어요.
머지않아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 믿습니다. MBC 역시 바닥부터 다시 일어나 국민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겠죠. 쉽진 않겠지만 절대 회피해서는 안 되는 싸움입니다. 그 싸움을 시작할 수 있도록 새해 벽두부터 용기를 북돋워 준 그대들이 자랑스럽습니다.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합니다. 막내들.
▲MBC 파업에 참여했다 김재철 전 사장에 의해 직종과 무관한 곳으로 전보발령이 났던 허일후 아나운서 등 노조원 54명이 서울 남부지법의 부당전보에 대한 '전보발령 효력정지 가처분' 승소에 따라 지난 2013년 4월 9일 현업에 복귀하며 조합원들과 포옹하고 있다. 하지만 판결 이후 2017년 1월 현재 아직도 100명 이상이 복귀하지 못하고 있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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