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어렵게 성공했다. 그 의사는 모든 것을 증언하겠다고 했다. 그것도 카메라 앞에서 얼굴 내놓고 정식으로 인터뷰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의 7시간'을 꼭 밝혀야 할 이유를 설득 혹은 읍소하면서 장시간 매달린 뒤였다. 인터뷰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전화를 끊고 나자 비로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게 됐다. MBC 기자라고는 했지만, 해직기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인터넷 검색해서 내 '정체'를 알게 되면 신분 속였다며 결심을 바꿀까? 차라리 '뉴스타파' 최승호 선배한테 토스할까? 함께 일하자는 제안은 뿌리쳤지만 지금 이 국면을 주도하는 종편 채널들에 제보할까? 아니면 그냥 내 페이스북에 동영상을 올릴까?

식은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은 안방 문을 올려다보았다. '생시'(生時)로 복귀하는 데는 몇 초 걸리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다음날, 상암동 MBC 앞에 차린 해직자 천막농성장에 앉아 있는 동안 여러 후배 기자들이 찾아왔다. 엄밀히 말해 기자는 거의 없었다. 취재와 보도 행위를 할 수 없는 곳으로 쫓겨나 3, 4년째 지내는 이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취재하는 꿈을 꿨다는 기자가 또 있었다. '타사는 이런 이런 취재를 하고 있다'는 부러움 섞인 수다 속에서, 'MBC 뉴스는 박근혜와 운명을 같이 하려는 것 같다'는 한숨 섞인 넋두리 속에서, 나는 내 꿈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촛불 켜고 MBC 껐다

언론노조 MBC본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실보도' 촉구 농성 언론노조 MBC본부 집행부들이 9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 앞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실보도' 및 '안광한 사장,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를 촉구하는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 언론노조 MBC본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실보도' 촉구 농성 언론노조 MBC본부 집행부들이 9일 오전 서울 상암동 MBC사옥 앞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진실보도' 및 '안광한 사장, 김장겸 보도본부장, 최기화 보도국장 사퇴'를 촉구하는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 이정민




지나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천막의 한쪽 면을 열어놓아 더러 북동풍이 들어왔는데, 그건 견딜 만했다. 11월의 바깥 바람보다 천막 안에서 동료들과 나눈 대화가 더 차가웠고, '사람들은 이제 MBC를 말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우리들의 마음은 결빙됐다.

나 : 요즘 박근혜 관련 뉴스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MBC를 더 이상 언론기관으로 필요로 하지도 않고, MBC가 정상화되는 것에 관심 갖지도 않을 것 같아.

후배A : 사람들이 이제 JTBC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들 해요. 확실한 대체재가 나타났잖아요.

선배B :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것도 이 국면에서 그다지 설득력이 있을까 걱정이네.

나 : 공영방송은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것 같아요. 정권을 누가 잡든 매번 권력에 편향됐다는 말만 나오고. 사주와 자본의 지배를 받는 종편이 오히려 권력 감시 기능을 충실히 하니. 종편 등장하면 여론 다양성 해치고 저널리즘을 타락시킬 거라던 논리에 이제 누가 공감하겠어요?

나는 대학에서 방송뉴스를 가르치는 선생으로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놓고 신이 나서 강의할 수도 있다. '기레기'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기자들이 진실의 발굴자, 수호자이자 말 그대로 감시견 역할에 매진하고 있지 않은가? 뉴스를 통해 유포된 정보 덕분에 의회와 시민들이 새로운 규칙과 해법을 만들고, 이제는 새로운 정부와 체제를 건설하는 데 나선 상황이 아닌가? 언론학도들이라면 한 번쯤 봤을 코바치와 로젠스틸의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과 같은 교과서에나 언급했던 규범적 상황이 오늘날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다고 힘주어 말할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했다.

자괴감 탓이었던 것 같다. 지금 언론 스스로 저널리즘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거기 유독 MBC만 빠져 있다. 방송뉴스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높아지고 방송기자의 매력은 커지고 있지만 유독 MBC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나는 MBC 구성원들이 받고 있는 고통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것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지루할 정도로 많이 들었을 테고,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고 되물으면 딱히 할 말도 없다. '마봉춘'의 귀환을 바라는 고마운 시청자들의 응원은 그동안 분에 넘치도록 받아왔기에 더 이상 도와달라고 할 염치도 없다.

이 나라의 주인이자 MBC의 주인인 국민들은 이미 답을 내놓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지율 4%로 최저치를 경신하던 날, MBC 뉴스데스크도 시청률 3.4%(TNS기준, 24일 뉴스데스크) 라는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뉴스만 아니었다면 프로그램 자체를 폐지할 수준이 되고 말았다. 국민은 대통령에게는 하야의 메시지를, MBC 보도 책임자들에게는 뉴스 농단을 중단하고 퇴진하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촛불을 켜고 MBC를 껐다.

MBC 구성원들, 다시 투쟁 나설 때

 지난 15일 박성호 해직기자가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청와대 비호 안광한 MBC 사장은 사퇴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언론노조 MBC본부는 지난 2일부터 MBC 앞에서 천막 농성과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15일 박성호 해직기자가 서울 상암동 MBC 사옥 앞에서 '청와대 비호 안광한 MBC 사장은 사퇴하라'는 내용의 피켓을 들고 있다. 언론노조 MBC본부는 지난 2일부터 MBC 앞에서 천막 농성과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다. ⓒ MBC언론노조


이런 상황이라면 MBC 문제의 해결 방향은 분명하다. 시청자들에게 무엇을 더 바랄 것도 아니고 정치 상황의 변동을 기다릴 것도 아니다. 주말 촛불집회 때 광화문에서는 초등학생도 마이크를 잡는다. MBC 내부 구성원들도 침묵을 깨고 저항하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보도국 내부 게시판에는 기자들의 참회록이 잇따르며 쫓겨난 기자들의 제자리 복귀를 요구하고 있지만, 더 나아가야 한다. 죽여야 살릴 수 있고, 멈춰세워야 다시 달릴 수 있는 형용모순의 상황이다.

2012년에 170일 파업을 했고, 4년 넘도록 지옥생활 중인데 무슨 소리냐는 동료들의 원망을 들을 수도 있다. 하지만 투쟁은 일회용이 아니다. '그때 싸웠으니 지금은 가만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라면, 시민이 이뤄놓을 명예로운 혁명 이후에 무임승차하는 셈이 된다. 87년에도 그랬는데 지금 또 그럴 수는 없다. 2012년의 투쟁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만 2016년의 투쟁은 새로운 상황 인식을 요구한다. 이제는 MBC의 정상화가 아니라 MBC의 생존이 문제다. 침몰하는 MBC를 보며 구성원들이 구조에 나서지 않는다면 도움 청할 곳은 없다.

제도를 고치는 것도 긴요하다. KBS·MBC의 사장 선임 제도를 바꾸자는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의 의미는 간단하다. 세월호와 박근혜 게이트를 겪은 국민들에게는 이제 설명이 쉬울 것 같다. '사장 선임 제도를 바꾸면 좋은 방송을 할 수 있을 테니 도와달라'는 게 아니라 '지금 목도하고 있듯이 공영방송이 사회적 흉기가 되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라는 최소 요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그래야 박근혜 정권을 결사옹위하는데 앞장섰던 공영방송 내의 부역 언론인들을 청산할 길도 열린다.  

지금은 '독립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언론'이라는 가치와 목적이 'JTBC'라는 수단을 통해 성공적으로 실현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그 수단에 환호하고 있다. 그러나 저널리즘이 추구해야 할 가치와 목적을 고려한다면, 국민들 입장에서는 공영방송이라는 수단이 이대로 망가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보수 신문과 보수 종편이 지배하는 기울어진 운동장이 일시적으로 수평을 찾았지만, 촛불 시민들은 KBS와 MBC에 제2, 제3의 '손석희'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수단은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

글쓴이 박성호 기자는 누구?
글쓴이 박성호씨는 MBC 해직 기자다. 2012년 MBC 파업 때 두 차례 해고됐다.

박성호씨는 1995년 MBC에 입사해 2011~2012년에 MBC 기자회장을 맡았다. MBC 파업의 도화선이 된 보도본부장·보도국장 불신임 투표와 기자회 제작거부를 이끌었다. 현재 고려대에서 언론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한국기자협회 부회장, 방송기자연합회 편집위원장을 맡고 있다.


MBC MBC뉴스 박성호기자 해직기자 그런데공영방송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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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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