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해온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시의 압력으로 인해 운명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영화계는 독립성과 자율성을 외치며 결사항전 분위기입니다. 당장 올해 영화제 개최조차 점점 불투명해지는 상황입니다. 백척간두의 위기에 서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오마이스타>는 누구보다 이 사태를 애가 타며 지켜보고 있는 젊은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전달합니다. 그 여덟 번째로, <철암계곡의 혈투>의 지하진 감독입니다. [편집자말]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의 한 장면.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의 한 장면. ⓒ 차이밍량


2003년 대만의 배우 첸샹치는 차이밍량 감독의 영화 <안녕, 용문객잔>의 주연을 맡은 인연으로 부산을 방문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대만에 실재하는 1000석 규모의 '복화대극장'이다. 폐관을 하루 앞둔 이곳에선 호금전 감독의 무협 영화 <용문객잔>이 마지막으로 상영되고 있다. 쉴 새 없이 폭우가 쏟아지는 이날, 다리를 저는 매표소 직원(첸샹치 분), 영사기사, 동성애 파트너를 찾아온 남자들이 유령처럼 극장을 배회한다는 게 굳이 내용이라면 내용이다.

영화 상영이 끝나고 무대인사 차 올라온 첸샹치는 영화 속의 미스터리한 모습과 달리, 쾌활했다. 그녀는 <안녕, 용문객잔>의 원제가 <不散(부산)>이란 사실을 우리(관객)에게 알려줬다. 중국어로는 '푸산'이라 발음한다. '산'은 산산이 흩어지다 할 때의 산인데, '흐트러지다, 혹은 끝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不散은 '끝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때만 해도 부산영화제의 영어 약칭은 BIFF가 아니라 PIFF였고, 부산은 Pusan이라 표기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영문표기법에 따라 2011년부터 BIFF로 표기하고 있다- 편집자 주)

첸샹치의 말을 이해하기엔, 2003년 난 고작 20대였다

 <안녕, 용문객잔>의 한장면. 다리를 저는 매표소 직원으로 출연한 대만 배우 첸샹치의 모습이다.

<안녕, 용문객잔>의 한장면. 다리를 저는 매표소 직원으로 출연한 대만 배우 첸샹치의 모습이다. ⓒ 차이밍량

첸샹치는 자신의 영화 제목이 영화제가 열리는 도시의 이름과 같다는 우연을 좋아했다. 차이밍량의 영화 <부산>에 등장하는 인간들은 산 것인지 유령인지 모호하다. 그들이 배회하는 극장은 내일이면 사라질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영화는 극장이 문을 닫기 하루 전에 끝을 맺고, 이들은 필름 속에 영원히 각인됐다. 영화가 가진 시간의 한계가 오히려 영원불멸의 가능성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니 이 영화의 원제인 '끝나지 않는다'는 곧 감독의 의지인 셈이다.

첸샹치는 이 영화의 제목이 의미하는 바처럼 "부산영화제가 앞으로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빌었다. 나를 포함한 관객들은 첸샹치의 재치 있는 인사에 환호했다. 그것은 아마 배우가 자신을 초청한 영화제에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을 것이다.

그때 난 고작 20대였고, 부산영화제의 몰락 혹은 파국이란 변수를 따져보기에는 너무나 낙관적이었다. 첸샹치의 간절한 바람은 당시엔 그냥 덕담 내지는 담백한 찬사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만약 부산영화제가 영원하지 않게 된다면, 정말 끝난다면, 그 파국은 어떤 모습일까? 당시 내가 어렴풋이 상상했던 건 그저 영화제 스스로 쇠락하는 모습 정도였다.

일례로 가까운 도쿄국제영화제가 그랬다. 그들의 몰락엔 부산이 어느 정도 일조한 측면이 있다. 도쿄국제영화제는 한때 아시아 영화제의 맹주였지만, 혁신과 의제 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자국 영화 산업의 몰락이 동반됐다. 반대급부로 부산영화제가 무섭게 성장했다. 그렇다고 도쿄영화제가 끝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해마다 대규모로 영화제를 개최한다. 하지만 세계 영화인들이 아시아 영화(계)의 과거, 현재, 미래를 궁금해 하며 주목하는 영화제는 언제나 부산영화제다.

부산영화제라는 것

난 단편과 장편 영화, 프로젝트 등으로 다양한 영화제의 초청을 받아 보았지만, 부산과는 유독 한 번도 인연이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1998년 가을 밤 서울 종로 피맛골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를 들이켠 뒤 자정 서울발 새마을 열차를 타고 처음 남포동에 도착한 이래 거의 해마다 부산영화제를 찾았다.

아침마다 바닷바람으로 숙취를 몰아내며 전 세계에서 도착한 새로운 이미지와 시간, 얼굴들에 환호했다. 영화의 전당이 완공되기 전, 안개 낀 수영만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흐릿한 화면, 추위, 산만함과의 전쟁이었지만, 메아리처럼 울리는 사운드와 아련한 파도소리의 중첩, 바닷가 공간만이 지닌 습기와 짭짤함은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영화제의 상징과도 같은 GV(관객과의 대화)는 주로 지나치게 왁자지껄하고 황당할 정도로 무례한 관객들의 향연이었으나, 때로 허우 샤오시엔 감독에게서 "롱테이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눈물이 날 정도로 깊이 있는 대답을 들었고, 한물 간 줄 알았던 레오스 카락스 감독으로부터 영화를 사랑하는 방법을 다시 배울 때도 있었다. 그것들을 자양분 삼아 나는 불확실한 시간을 견디며 영화를 계속해 왔고, 성장할 수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부산영화제는 나의 것이다. 나와 같이 영화제와 함께 성장해온 수백만 관객들의 것이다. 예매 당일 아침 가슴 졸이며 선택한 시간표를 반복해 들여다보며 품었던 기대와 환상, 때가 되어 그 영화들을 기어이 스크린에서 목격하고 열광 혹은 야유를 보내며 우리들의 선택지를 차곡차곡 쌓아올려온 것이 이 영화제의 실체이자 역사다.

또한 온전히 프로그래머의 것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선택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 1년 내내 영화의 미래를 먼저 훔쳐본 그들의 것이다. 그들의 선구안에 감탄하거나, 비웃거나, 싫으면 영화제를 외면할지언정, 그들의 결정은 절대적이며 왈가왈부의 차원이 아니다. 또한 이곳에 초청되어 온 수많은 영화인들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새롭게 발견한 공간과 시간과 얼굴을 (때때로) 최초로 부산에 가져옴으로써 우리에게 첨예한 사유의 시간을 선물했다. 그 밖의 것들은 부수적이고, 잔망스럽기까지 하다.

부산시장이라는 당연직 조직위원장

 지난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지난해 10월 열린 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레드카펫으로 입장하고 있는 서병수 부산시장. 하지만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서 시장은 부산국제영화제를 다시 흔들기 시작했다. ⓒ 부산국제영화제


부산시장이 바뀔 때마다 바뀌는 당연직인 조직위원장은 (우리들과 달리) 이 영화제를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우리 아파트 관리소 아저씨가 내가 받은 택배 한 개가 맘에 안 든다며 아파트 택배 전부를 막아버린다면 얼마나 황당한 일일까. 그걸 넘어, 이 아저씨는 아파트를 없애버리려 한다. 부산 시장은 이 비유를 이해할까?

부산영화제가 파국을 맞은 건 조직위원장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서다. 게다가 영화인들은 '시켰다'는 사실 자체에 분개해 핏대를 높이고 있으니 불경죄와 괘씸죄까지 추가됐다. 현 정권 고유의 특징 중 하나가 심기를 건드린 것에 관한 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보복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걸 생고집이라 부른다.

부산영화제가 단 하나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거나 단 한 편의 영화가 이 영화제의 모든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하면, 모든 영화팬들이 "이 바닥 돌아가는 걸 몰라서 저래" 하며 비웃겠지만, 저들은 망치를 손에 든 채 그걸 진지하게 되새긴다.

국제영화제는 이 다양한 땅(지구)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제각각의 삶을 예리한 감수성으로 담아낸 영화들, 관심을 가져주지 않으면 이내 잊힐 수밖에 없는 영화들을 적절히 포착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있다. 그것들을 담론의 공간으로 끄집어내서 생명을 연장시켜 주는 것, 그리고 옆으로 조용히 비켜서는 것이 영화제의 의무이자 운명이다.

우리는 그렇게 선택된 영화들에 대해 숱한 잡소리로 왈가왈부할 수는 있지만, 그걸 틀라 틀지 말라 할 권한은 전혀 없다. 그렇게 하는 순간 모든 공정함과 가능성은 와르르 무너진다.

지독한 생고집에 맞서

영화인들 부산국제영화제 '보이콧' 경고 부산국제영화제(BIFF) 지키기 범 영화인 비대위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시(시장 서병수)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계속 부정한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 영화인들 부산국제영화제 '보이콧' 경고 부산국제영화제(BIFF) 지키기 범 영화인 비대위는 2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부산국제영화제 지키기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부산시(시장 서병수)가 영화제의 자율성을 계속 부정한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참가를 전면 거부할 것"이라고 밝혔다. ⓒ 권우성


이 왁자지껄하고 아름다운 축제가 내포한 예측 불가능성을 누군가는 불온함으로, 통제를 벗어난 위협으로 간주한 듯하다. 그러니 우리는 허깨비가 되어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결코 영화제가 자초한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영화제의 것도 아닌 특정 정체성이 덧입힌 존재가 되어 지독한 생고집에 맞서 부르짖고 있다.

2003년 차이밍량 감독의 <부산> <푸산> 혹은 <끝나지 않는다>에 등장했던 절름발이 여배우의 예언적인 바람, "이 영화제가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빈다"는 말이 13년이 지난 지금 불현듯 부산의 대기에 메아리친다. 이제는 유쾌하고 낭랑하지 않고, 울기라도 할 것처럼 가느다랗고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하고 있다.

당장의 파국은 피할 수 없을 듯 보이지만, 부산영화제는 결국 상처를 회복하고 원래의 왁자지껄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거부하고, 지킬 것을 끝까지 보듬어 안는 방식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수많은 관객들과 영화인들, 심지어 영화 속 유령들까지 동원하여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이 땅에 영화가 존재하는 한, 축제는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

지하진 감독은 누구?

1980년생인 지하진 감독은 단편 <늪 속의 괴물>(2007)의 연출을 맡으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첫 장편 연출작 <철암계곡의 혈투>(2011)로 제15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2개 부문의 상을 받았다. 한국 장르영화를 이끌 차세대 영화인 중 하나로 꼽히며 관객들의 기대를 받는 감독이다.

[BIFF를 지지하는 젊은 목소리]
[① 백재호] 부산시민 여러분, 부디 부산국제영화제 지켜주세요
[② 이승원] 누가 BIFF라는 오아시스를 소유하려 하는가
[③ 이근우] "저는 이 영화 부산국제영화제에 낼 거예요"
[④ 조창호] 서병수 시장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한 장의 사진
[⑤ 박석영] 저는 믿습니다, BIFF 키워온 부산 시민들을
[⑥ 이돈구] 부산국제영화제는 내게 기적이다
[⑦ 박홍민] 영화제 제1명제: 초청되는 영화에는 성역이 없다

* 우리는 부산국제영화제를 지지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지키기 백만서명운동 사이트' (http://isupportbiff.com)에서 관련 소식을 접할 수 있습니다. #isupportbi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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