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안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많은 화제를 모으고 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놀라울 정도로 당시의 분위기를 세심하게 묘사한 세트와 소품 그리고 등장인물 들의 의상일 것이다.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1988년의 풋풋했던 향수를 떠올릴 수 있다. 드라마의 배경이었던 1988년의 프로야구는 어떻게 전개 되었을까? 1988 시즌의 주요 키워드들을 떠올려본다.

[키워드 ①] 신인 가뭄

 1988 신인왕은 MBC청룡(현 LG 트윈스) 소속 선수들의 집안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1988 신인왕은 MBC청룡(현 LG 트윈스) 소속 선수들의 집안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 MBC청룡


1988년에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 이벤트였던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정부의 주도 하에 모든 국력이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대명제에 집중되었다. 비단 잔치를 어떻게 잘 치르는가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이 출전하는 모든 종목의 경기력을 어떻게 해서든 최고치로 끌어올리는 것도 지상과제였다.

그래서 시범종목으로 치러침에도 불구하고 야구 대표팀도 정부의 주도 하에 핵심 전력 선수들의 프로진출이 유보되었다. 당시 야구는 아마 선수들만 출전이 허용된 관계로 당시 대어급 신인들이었던 조계현, 송진우, 노찬엽, 강기웅, 류명선 등의 핵심 선수들의 프로입단이 1년 유보되었다.

그러다보니 상대적으로 1988시즌에는 신인 가뭄 현상이 두드러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프로와 아마간의 격차가 지금보다는 크지 않았기에 아마에서 대어급으로 칭송받던 선수들이 프로에 가서도 입단 첫 해 주전을 꿰차고 돌풍을 일으키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대어급 신인들이 자동적으로 프로입단이 유보되면서 어쩔 수 없이 준척급 신인들이 1988 시즌 신인왕 경쟁에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1988 신인왕은 MBC청룡(현 LG 트윈스) 소속 선수들의 집안 경쟁으로 전개되었다.

언더핸드급 투수 이용철(현 KBS N Sports 해설위원)이 팀 동료 김상호를 제치고 신인왕을 거머쥐었다. 당시 이용철의 시즌 성적은 144.1 이닝 7승 11패 평균자책점 2.74였는데 2년 전 같은 팀의 김건우가 신인왕을 받을 당시 기록했던 성적인 229이닝 18승 6패 평균자책점 1.81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었다.

역대 신인왕 수상자 중 가장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신인왕을 굳이 수여해야 하느냐는 논란도 빚어졌다. 하지만 그해 MBC 청룡의 팀 성적은 그야말로 바닥을 기고 있었으며, 팀이 어려운 와중에도 꾸준히 로테이션을 지키면서 대체선수 대비 팀 승리 기여도 (WAR) 2.67을 기록, 팀 내 투수 중에선 오영일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팀 전체로 봐도 김상훈-오영일-박흥식에 이어 네 번째로 높은 기여도를 기록했다.

나름 고군분투하며 일궈낸 성적이기에 이용철의 신인왕 수상도 박수를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신인왕 경쟁을 펼쳤던 김상호는 2년 뒤 OB 베어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95년 잠실구장을 홈으로 쓰는 팀 사상 첫 홈런왕(홈런 25개)에 등극하면서 MVP를 수상한다.

당시 MVP 후보 중에 선동열 이후 5년 만에 시즌 20승을 기록한 이상훈(LG 트윈스)이라는 강력한 경쟁자가 있었지만 당시 시즌 MVP투표가 포스트시즌이 끝나고 진행되는 바람에 소속팀 우승의 혜택을 본 셈이었다. 입단 동기생인 이용철과 김상호는 입단 당시 대어급으로 칭송받지는 못했지만, '상복'만은 타고 났다고 볼 수 있다.

[키워드 ②] 빙그레 돌풍

1986년부터 1군 무대에 뛰어든 빙그레 이글스(현 한화 이글스)는 창단 당시 선수수급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으면서 팀 전력 구성 자체에 많은 애를 먹어야 했다. 하지만 빠른 시간 내에 팀을 정비하고 1988년부터 김영덕 감독 강병철 수석코치 체제로 임한 빙그레는 창단 4시즌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한다.

1987년 신인왕 이정훈을 필두로 유승안, 이강돈, 강정길, 고원부, 장종훈 등이 매서운 타격과 파워를 과시하며 이른바 '다이너마이트 타선'의 골격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투수진에서는 창단 멤버이자 프랜차이즈 스타인 이상군과 한희민이 나란히 16승을 기록하면서 강력한 쌍두마차를 구축한다. 이외에 김홍명, 김대중, 이동석, 김용남 등이 힘을 보태면서 투수진의 깊이를 더한다.

전기리그 2위를 차지하며 일찌감치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한 빙그레는 전통의 강호 삼성 라이온즈와의 플레이오프에서 3경기를 가볍게 쓸어담는 돌풍을 일으킨다. 한국시리즈 상대는 큰 경기의 최강자 해태 타이거즈. 빙그레는 한국시리즈 초반 3경기를 모두 내주면서 싱겁게 물러나는 듯 했으나 4차전 14-3 대승을 필두로 잠실로 넘어온 5차전에서도 선발투수 이상군의 눈부신 역투에 힘입어 승부를 6차전까지 끌고 간다.

그러나 빙그레의 돌풍은 6차전에서 멈추고 말았고,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하지만 이후 빙그레는 92년까지 5시즌 중 무려 4차례나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신흥강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해태와 삼성의 2강 체제로 고착화 되는 듯 싶었던 프로야구는 1988시즌 빙그레 이글스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면서 팬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흥미를 선사하게 된다.

[키워드 ③] 최고의 전성기에 접어든 김성한

오리궁둥이 타격폼으로 팬들에게 각인되어 있는 김성한은 원년에는 투수까지 겸하면서 10승을 거둔 팔방미인이었다. 장타력과 더불어 빠른 주력까지 겸비한 호타준족 스타일의 김성한은 30세에 접어든 1988 시즌에 그의 프로야구 인생 중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85시즌 22홈런으로 한 차례 홈런왕에 올랐지만 팀내 선배 김봉연이나 동갑내기 라이벌 이만수에 비해 거포의 이미지는 약한 편이었다. 그러나 1988시즌 김성한은 그 누구도 정복하지 못했던 30홈런 고지에 사상 처음으로 올라선다.

타점 또한 89타점을 기록하며 기존에 이만수가 세운 한 시즌 최다타점 기록도 경신하게 된다. 홈런, 타점 뿐만 아니라 도루도 16개를 기록하면서 호타준족의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는데 성공한 김성한은 1985시즌에 이어 생애 두 번째로 MVP를 수상한다.

김성한의 돌풍이 거셌지만, 팀 내에선 정작 대체선수 대비 승리 기여도(WAR)에서 그보다 더 높은 수치를 기록한 선수가 있었다. 다름아닌 이순철이었다. 타격, 주루, 수비 등 모든 부분에서 이순철은 팀의 활로를 뚫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타율 0.313, 13홈런 52타점 58도루를 기록한 이순철은 김성한이 부상으로 한국시리즈 전력에서 제외되어 있었지만 그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워주는 선봉장 역할을 해냈다.

시즌 홈런왕이 전력에서 제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들었던 해태 타이거즈의 전력은 상대팀에게는 공포 그 자체일 수밖에 없었다.

[키워드 ④] 마운드의 세대교체

최동원-김시진-선동열 트로이카 체제에 균열이 오기 시작했다. 1963년생인 선동열은 가장 최절정기의 구위를 통해 건재를 과시했으나 30줄에 접어든 최동원과 김시진은 각각 연봉협상 지연과 부상 등으로 시즌 초반부터 정상적으로 합류하지 못하였다. 뒤늦게 복귀했지만 최동원과 김시진 모두 전성기의 구위보다는 확연히 떨어진 모습을 보이며 투수 부문 각종 순위에서 이름이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선발과 구원의 분업화가 확실하게 자리잡지 않았던 당시 팀을 위해 수시로 마운드에 오르며 쉼없는 시즌을 보낸 두 에이스는 30세에 접어들며 서서히 노쇠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다승왕에 오른 윤학길(18승)을 필두로 빙그레 돌풍의 중심에 자리한 두 쌍두마차 에이스 이상군(16승), 한희민(16승), 84년 신인왕 이후 모처럼 구위를 회복한 OB의 윤석환(13승), 미남 사이드암 김진욱(OB, 11승) 등이 채웠다.

시즌 중반에 합류한 최동원이 7승에 머문 롯데는 윤학길이 18승을 거두면서 새로운 에이스로의 등극을 예고했고, 부상에서 회복한 김시진이 분전한 삼성은 성준(11승)과 김훈기(10승)등이 에이스 역할을 맡을 가능성을 보인다. 두

두 팀은 1988시즌이 종료된 직후 팀내 마운드 에이스 구도 변화의 조짐에 너무도 큰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서로 간의 이해관계(삼성 - 큰 경기에 강한 에이스에 대한 열망, 롯데 - 존재감이 너무 커져 버린 에이스를 정리하려는 프런트의 의지)가 맞아 떨어지면서 충격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

유니폼을 바꿔입는 것은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에이스들은 결국 선수생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예우라는 개념이 전혀 없던 프로야구 초창기에 빚어진 있어서는 안 될 트레이드의 대표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키워드 ⑤] 불운의 시작

일반적으로 2루수 포지션은 외야수나 1루수에 비해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형의 선수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빠른 타구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큰 체구의 선수보다는 180cm 이하의 선수들이 더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초창기에는 더욱 그런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MBC 청룡의 김인식, OB 베어스의 김광수 등 일부 팀의 주전 2루수 선수들은 신장이 170cm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하지만 순발력이 넘치는 플레이로 팀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2루수는 작은 선수들만의 전유물이라는 선입견을 넘어선 선수가 있었다. 삼성라이온즈의 김성래였다. 184cm의 큰 신장을 보유한 김성래는 특유의 유연함으로 넓은 수비범위를 과시하였다.

워낙에 하드웨어가 좋다 보니 타격에서도 일가견을 발휘했는데 1987시즌에는 22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2루수로선 사상 처음으로 홈런왕에 등극하였다. 지금도 2루수 포지션 홈런왕은 1987년의 김성래가 유일하다.

대형 내야수로서 김성래의 가치는 1986시즌부터 매년 업그레이드 상종가를 기록했다. 1987시즌 홈런왕에 이어 1988시즌에는 정교함까지 더해지며 사상 첫 타격왕 등극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시즌 막바지에 접어든 1988년 9월 6일 해태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김성래는 상대 1루수 김성한과 크게 충돌하면서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은 김성래는 선수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공교롭게도 다음 시즌 또 하나의 대형 2루수로 극찬을 받고 있던 강기웅이 입단하게 되는 상황에서 김성래는 선의의 경쟁을 펼쳐볼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기나긴 재활의 시간을 맞이한다. 만약 김성래가 불의의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역사도 상당히 많은 부분 바뀌었을 것이다.

메이저리그의 알렉스 로드리게스 같은 대형 내야수를 우리 야구팬들은 이미 1980년대 대한민국 프로야구에서 더 오래 접할 수 있었을 텐데 불의의 부상은 선수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프로야구에 큰 손실을 안겨주고 말았다.

1988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관심이 많이 분산된 프로야구 1988시즌은 1985시즌 이후 3년 만에 200만 관중에 못 미치는 총 관중(1,932,145명)을 기록한다. 그러나 신생팀 빙그레 이글스의 돌풍 및 세대교체를 통한 새로운 얼굴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듬해 역대 최다 총관중을 기록하는 발판을 마련한다. 1988시즌은 올림픽으로 인해 열기가 다소 사그라 들었지만 이후 1990년대 르네상스 진입을 위한 초석이 다져진 시즌으로 기억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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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스탯티즈 통계참조. 이 기사는 네이버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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