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다우트>의 한 장면
실험극장
극중 플린과 엘로이셔스의 대립을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보기에는 아까운 측면이 있다. 그저 보수주의자와 급진주의자라는 개인의 층위가 아니라 '상징'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극의 시대적인 배경은 1964년 브롱크스의 성 니콜라스 교구 학교다.
플린과 엘로이셔스가 대립각을 펼치기 2년 전인 1962년, 가톨릭에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당시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는 현대화되어야 하고, 평신도가 접하기 쉬운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가톨릭 안에서 개혁의 물결이 필요하다는 점을 힘주어 강조했다. 그 결과 라틴어로만 드리던 가톨릭의 미사는 현지 성당에 맞게 각 나라의 언어로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보수주의자가 들으면 펄쩍 뛸 파격적인 교회 개혁안이 논의된 것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다시 극 중의 플린과 엘로이셔스로 대입하면, 플린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지지하는 개혁주의자 또는 교황 요한 23세로 상정할 수 있다. 플린의 관점으로 보면 가톨릭 교회는 성도를 다스리고 명령하는 수직적인 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도 한 명 한 명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성당이 성도 개개인의 삶과 고민을 품어주고 아우를 줄 알아야 옳다.
플린의 수평적인 관점은, 기존의 가톨릭적 관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개혁안이 아닐 수 없다. 극 중 플린이 사제복을 안에 입고 학생들과 농구공을 잡는다는 설정은, 교회가 성도에게 먼저 다가서야 한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안과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플린을 엘로이셔스가 곱게 볼 리 없다. 의심이 들기 이전부터 플린의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엘로이셔스는 결코 동의할 수 없었다. 엘로이셔스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혁안에 동의할 수 없는 보수주의자를 상징한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자 한다면, 성도는 개혁주의자의 주장처럼 성당이 다가와주기를 바라지 않아야 옳다. 믿음의 정화를 위해서라면 성당으로 신도가 달려 나와야 한다고 믿는다.
플린이 로널드에게 의심될 만한 행동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수녀인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신부 플린을 수녀가 단죄하고 심판하려 든다는 건, 평소 플린의 개혁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던 엘로이셔스의 보수성이 플린보다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하는 제스처로 보인다.
존 F. 케네디도 보이는 '다우트'
▲연극 <다우트>의 한 장면실험극장
반면 극을 미국 현대사적으로 보자면 플린은 존 F. 케네디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인종과 종교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한 민권 법안을 통과시키고자 노력했고 노인과 여성, 저소득층의 권익을 위해서도 노력한 대통령이다.
플린이 술을 먹인 게 아닌가 하고 의심받는 학생 로널드의 인종이 백인이 아니라 흑인이라는 점은, 마틴 루터 킹과 말콤 X가 흑인 인권의 신장을 위해 백인 우월주의에 맞서 싸우던 1960년대의 시대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학교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견제를 당하던 로널드에게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밀어주고자 한 플린의 손길은, 흑인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던 당시 존 F. 케네디의 신념과 궤를 같이 한다. 플린이 엘로이셔스의 '확증 편향'에 의해 학교에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건, 존 F. 케네디가 오스왈드에게 흉탄을 맞아 더 이상 이 세상에 머무를 수 없었음과도 맞닿고 있다.
존 F. 케네디가 서거한 해는 1963년이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일어난 해는 1962년이다. <다우트>의 작가 존 패트릭 샌리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와 존 F. 케네디가 공유했던 급진적인 진보주의가 보수주의의 벽을 뚫는다는 것이 얼마만큼 어려웠는지, 기존의 관념을 깨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걸 받아들이게 만든다는 것이 얼마만큼 어렵고 지난한지를 1964년을 배경으로 한 연극에 보여준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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