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쟁이 유氏 메인 포스터

▲ 염쟁이 유氏 메인 포스터 ⓒ 염쟁이 유氏


'사형대로 끌려가는 신부에게 사형집행을 돕는 신부가 말한다.' "당신에게 신의 은총이 있기를.." 그러자 끌려가던 신부가 답한다. "죽는 것은 어렵지 않네. 잘 사는 것이 어렵지."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영화 <무방비 도시> 가운데 한 장면이다. 2차대전 당시의 실화를 영화로 재구성한 이 작품은 나치 치하의 로마에서 저항활동을 벌이는 사람들과 그들을 쫓는 독일 비밀경찰, 그리고 그 안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간 평범한 사람들을 네오 리얼리즘 특유의 담백한 시선으로 담아낸 명작이다. 내게는 신부의 사형집행 때 철망 너머로 모여든 아이들이 함께 휘파람을 불던 장면으로 기억되는 영화이기도 한데 이 작품을 통해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네오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손꼽히게 되었다.

며칠 전 대학로 이랑씨어터에서 공연된 연극 <염쟁이 유씨>를 보며 나는 7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무방비 도시>를 떠올렸다. 평생을 염쟁이로 살아온 주인공 유씨가 일생의 마지막 염을 하며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는 내용이었는데, 연극은 그 결말부에 이르러 유씨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죽는 거 무서워들 말아. 잘 사는 게 더 어렵고 힘들어."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짚는다는 공통점 때문이었을까? <염쟁이 유씨>의 결말을 보며 나는 문득 <무방비 도시>의 가슴아픈 그 장면을 떠올리고 말았다.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 하는 게 비단 이 두 작품 만은 아닐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매일 저녁 TV에서 방영하는 드라마만 해도 잊을 만하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삶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반복하지 않던가.

하지만 <무방비 도시>는 죽음을 이야기의 소재로 가져온 수많은 영화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눈 앞에 성큼 다가온 죽음 앞에서 "죽음이란 어렵지 않네. 잘 사는 것이 어렵지"라고 말하던 신부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의미있는 삶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화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찍어내는 리얼리즘으로부터 한 발 나아가 신부의 죽음을 통해 어떤 삶이 의미있는 삶인가를 부각시켜 표현하는 네오 리얼리즘의 도덕적 지위를 획득해낸 것이다. 시대적 한계를 감안하면 상당히 세련된 부분이 있는 <무방비 도시>와 달리 <염쟁이 유씨>는 그 결말부에서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주제의식을 노골적으로 표출하는 투박함이 두드러지지만, <무방비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의미있는 일이라 하겠다.

10년을 이어온 특색있는 1인극

염쟁이 유氏 연극의 한 장면

▲ 염쟁이 유氏 연극의 한 장면 ⓒ 염쟁이 유氏


유씨는 조상 대대로 염을 업으로 삼아온 집안에서 태어나 스스로도 염쟁이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다. 어느날 그는 일생의 마지막 염을 하기로 결심하고 몇 해 전 자신을 취재하러 왔던 기자에게 연락한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기자 앞에서 마지막 염을 시작하고 수시로부터 반함,소렴,대렴,입관에 이르는 염의 전 과정과 의미에 대해 설명한다.

연극은 유씨의 마지막 염 과정에서 염쟁이로 평생을 살아온 유씨의 이야기를 녹여내며 그로부터 작게는 그의 사연을 보이고 크게는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의 자세를 드러낸다. 연극이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죽음과 삶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때로는 풍자적이고 해학적이며 때로는 진지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형식적으로 <염쟁이 유씨>의 가장 큰 특징은 한 명의 배우가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1인극(모노 드라마)이라는 점이다. 다만 정통적인 모노드라마와는 달리 관객의 참여를 적극 유도하고 배우 스스로도 일인다역을 소화함으로써 1인극의 형식적 제약을 얼마간 탈피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하겠다.

1인극과 관객참여연극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기에 그 단점 역시 그대로 내보이는데, 배우의 연기력과 극에 참여하는 관객의 성향에 따라 극 전체의 완성도가 크게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그러하다. 특히 관객참여 형식은 근래 대학로 소극장에서 행해지는 연극·뮤지컬 등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배우와 관객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연의 형식적 외연을 확장한다는 장점에도 뚜렷한 목적 없이 남발되면 오히려 완성도를 해칠 수 있어 제작자의 고민이 요구된다 하겠다.

좋은 소재임에도 그 활용이 아쉬워

염쟁이 유氏 연극의 한 장면

▲ 염쟁이 유氏 연극의 한 장면 ⓒ 염쟁이 유氏


<염쟁이 유씨>는 김인경 작가의 작품으로 2004년 청주에서 초연된 이래 지난 10여 년 동안 꾸준히 공연을 가진 검증된 연극이다. 고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이래 가장 주목받는 1인극으로 평가받았으며 염이라는 특색있는 소재로부터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끌어내는데 성공했다는 호평도 얻었다. 현재 대학로 이랑씨어터에서 위성신의 연출로 공연하고 있는 이 작품은 초대 염쟁이 유순웅에 더해 임형택, 신현종이 3인 캐스팅 체제로 이끌고 있는데 이들이 서로 다른 성향의 배우라는 점에서 관객의 선택지가 다양하다고 하겠다.

연극은 죽음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1인극임에도 풍자 등 희극적 요소를 차용하고 관객의 참여도 적극적으로 유도해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가 조성되지 않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하지만 해학은 가벼우며 풍자의 깊이도 얕다는 점은 죽음을 소재로 하는 공연으로써 아쉬운 부분이다. 극의 후반부에서 풍자하는 어느 가족의 갈등 역시 지나치게 정형화된 이야기로 어떠한 새로움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으며 여성관객의 신체를 희화화하는 대사에선 웃음을 얻기 위해 불온한 전형마저 기꺼이 감수하려는 안이함마저 읽힌다. 충분히 매력적인 소재와 설득력 있는 전개에도 불구하고 깊이와 재미 모두에서 치열한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구성은 이 연극의 근본적 한계로 작용하는 듯하다.

관객의 입맛을 고려해 적당한 재미와 감동을 추구한 듯도 한데 만약 그렇다면 이 연극은 그 때문에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고 만 꼴이다. 작가는 이 작품과 같은 주제를 담고 있음에도 냉혹한 카메라로 더없이 뜨거운 기록을 써내려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를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무거운 주제를 가볍게 풀어내며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잡으려 한 대중지향적 연극으로 나름의 성취는 있다고 생각한다. 모노드라마인 동시에 참여연극의 형식을 차용하고 제한된 무대와 소품을 최대한 활용한 시도도 나쁘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1인극을 소화해낸 배우의 노력도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2006년 서울연극제 인기상부터 2013년 이데일리 문화대상 1분기 연극부문 수상 등 여러차례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이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 역시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껏 꾸준한 사랑을 받았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공연될 이 연극의 생명력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염쟁이 유氏 위성신 김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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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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