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당신에게 무인도 표류기를 권합니다

[리뷰] 정재영 주연의 영화 <김씨표류기>

*이 기사에는 영화의 줄거리나 주요 장면이 포함돼 있습니다.

살다보면,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에서 수많은 사람들의 홍수 속에 서있더라도 혼자라고 느낄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 정도만 조금씩 다를 뿐 각자 몫의 외로움이란 건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서울이라는 이 커다란 도시 속에서 정말 철저하게 혼자가 될 수 있을까? 독거 인구가 늘어나고, 사고나 병으로 사망한 지 며칠이나 지나서 발견되는 경우가 뉴스에 나오는 걸 보면 불가능한 일도 아닌 듯하다.

사람들로 가득한 빌딩숲 한가운데에 있더라도 홀로 사막에 서있는 기분, 여기 그런 외로움에 대한 영화가 있다. 이해준 감독의 2009년작 <김씨표류기>는 오늘날 서울을 배경으로, 고립된 개인의 모습을 비유적으로 그려낸다.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린 김씨, 눈 떠보니 무인도

영화의 첫 장면은 주인공인 어느 남자 '김씨'가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있는 모습으로 시작된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기계적인 친절함을 갖춘 누군가가 숫자를 읊어대고 있다. 대화의 끄트머리 즈음에서 김씨와 통화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업체의 직원이라는 것과 그 숫자들이 2억이 넘는 액수의 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금액이 김씨가 고스란히 갚아야 할 채무잔금이라는 것도.

"듣고 나니 더욱 용기가 생기네요."

통화가 끝나자 김씨는 마음을 굳힌 모양이다. 이 남자, 한강 다리의 난간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한숨을 쉬고 있다. 안타깝게도 그가 말한 용기는 삶을 위한 것이 아닌 죽음을 결심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나가던 사람이 이 순간을 보았다면 "죽을 용기로 살아라"고 타이를 테지만, 30대를 넘긴 듯한 나이에 회사의 구조 조정으로 정리해고 당한 그에게 2억 원의 빚은 이미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는지도 모른다. 애인도 이미 그의 무능력을 탓하며 이별 통보를 해온 뒤였다. 그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미련을 놓았고, 난간을 쥐고 있던 손도 힘없이 풀어진다. 세상에 지친 한 남자가 등 떠밀려 택한, '자살'이라는 이름의 이별이었다.

'풍덩'하고 한강 수면이 일순간 첨벙인다. 다리 위의 차들은 여전히 바쁘게 꼬리를 물고 달린다. 누구도 다리 위의 난간에서 벌어지는 일, 김씨의 죽음에는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의 삶에 대해서도 그랬듯이 말이다. 겉으로나마 평화로운 서울의 풍경처럼, 한강물도 다시 잠잠해진다. 한사람의 뒷모습이 그렇게 쉽게 수면 아래로 사라진다.

 영화 <김씨표류기>의 한 장면. 주인공 김씨(정재영)는 생활고와 팍팍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 위에서 한강에 투신하지만, 죽지 못하고 무인도에 갇힌 신세가 된다.
영화 <김씨표류기>의 한 장면. 주인공 김씨(정재영)는 생활고와 팍팍한 삶을 견디지 못하고 다리 위에서 한강에 투신하지만, 죽지 못하고 무인도에 갇힌 신세가 된다.시네마서비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정신을 차린 김씨는 구역질을 하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다시 눈을 뜨고 숨을 쉬게 되었다는 것부터가 이미 자신의 계획이 틀어졌음을 뜻한다. 그걸 눈치챈 김씨는 입안의 흙탕물을 뱉으면서 "죽지도 못하는 병신"이라며 자신을 욕한다. 멀리 우뚝 서있는 63빌딩이 보인다. '그래, 저기라면 한번에 제대로 죽을 수 있겠지'하고 생각하면서 그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얼마쯤 걸었는지 모르지만, 김씨는 무언가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한강과 다리들이 가까이서 보이지만, 도무지 자신이 발 딛고 서있는 모래밭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때서야 김씨는 자신이 한강의 밤섬에 갇힌 상태라는 것을 깨닫는다. 휴대폰은 배터리가 나가버렸고, 아무도 버려진 무인도를 쳐다보지 않는다. 꼼짝없이 갇힌 것이다.

거친 한강과 불안한 김씨, 그걸 지켜보는 그녀

절망한 김씨는 나무에 넥타이를 묶어서 다시 한번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정말이지,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세상에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이다. 고통과 답답함이 범벅이 되어 눈물로 쏟아지던 그 때, 김씨는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섬에 피어있던 꽃잎을 쥐고서 입으로 가져간다. 달달하다.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 찾아온, 몇 년 만에 느껴본 달콤한 맛. 김씨는 쥐어짜낸 의지로 다시 살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한강의 생태계는 도시에서 살았던 그에게 너무나 척박하다. 먹을 것이라곤 독이 들어있는지도 모를 버섯이 유일하고, 낚시 도구도 없이 강에 있는 어류를 잡는 일은 늘 허탕이다. 단백질을 섭취하겠다는 일념으로 나무 위 둥지 속 알들을 노려보지만, 너무 높아서 새똥만 머리에 맞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김씨표류기>의 한 장면. 표류된 김씨(정재영)를 관찰하는 그녀(정려원)는 인터넷에 의지한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간다.
<김씨표류기>의 한 장면. 표류된 김씨(정재영)를 관찰하는 그녀(정려원)는 인터넷에 의지한 채 자신을 숨기고 살아간다.시네마서비스

구조를 위해 모래 위에 'HELP'를 써놓은 김씨. 그런데 멀리서 그를 지켜보는 한 여자가 있다. 강변의 어느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또 다른 김씨, 그녀는 자기 방 바깥으로는 한발도 나가지 않으려 애쓴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미니홈피를 관리하고, 이따금씩 취미 삼아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로 달을 촬영한다. 사실 미니홈피는 그녀가 아닌 다른 미녀들의 이름과 사진을 도용한 것이고, 그녀는 얼굴의 흉터를 이유로 은둔 생활 중이다.

민방위 훈련으로 텅 빈 한낮의 거리를 촬영하던 그녀는 우연히 한강을 보다가 표류된 김씨를 발견한다. 맹랑한 이 아가씨는 그 남자의 엉뚱한 행동을 지켜보다 이내 그가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그를 관찰하기 시작하던 그녀는 악착같이 살아가려는 김씨의 모습에 호감을 갖게 된다. 자신을 표현하고 싶으나 수줍은 그녀는 종이에 짧은 글을 적어 빈 와인병에 담아 섬에 투척한다.

두 달이 지나서야 병에 담긴 쪽지를 발견한 김씨는 누군가 자신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리고 모래 위의 글씨를 'HELP'에서 'HELLO'로 바꿔서 적는다. 직접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이 서로를 알게 된 것이다. 흔한 메신저나 온라인의 아바타가 아니라, 종이와 모래에 적힌 투박한 손글씨(?)를 통해서. 과연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떤 관계를 이어가게 될 것인가, 그리고 김씨는 과연 섬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를 두고 영화는 흥미진진한 줄거리를 이어간다.

무인도 같은 도심 속 개인 그리고 소통을 그려낸 <김씨표류기>

 영화 <김씨표류기>의 포스터.
영화 <김씨표류기>의 포스터.시네마서비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다시 살자고 마음 먹자 밤섬의 김씨는 놀라운 임기응변을 발휘한다. 섬의 구석에 버려진 오리배를 주워 와서 지푸라기를 깔고 침실로 이용한다. 또한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피우는 법을 연마하고, 힘을 길러 나무 위로 올라가 새의 알을 얻는 일에 성공한다. 영화는 씁쓸한 자살 시도로 겪게 되는 김씨의 표류기를 매우 코믹하게 그려낸다. 주운 세제로 머리를 감다가 오염된 물에 죽은 물고기와 비둘기를 구워먹는 장면은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불행은 늘 한껏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찾아오기 마련이다. 더 이상 빚 독촉도, 자신을 구박하는 애인도 없는 무인도에서 소박하지만 만족스러운 삶을 가꾸던 김씨는 늦여름의 폭풍우를 만나게 된다.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가꾼 삶의 터전이 망가지고, 설상가상으로 그는 섬을 청소하러 온 공익 요원과 해병 전우회 대원들에게 쫓기게 된다.

또 다른 김씨에게도 위기가 닥쳐온다. 바깥의 일에 관심이 없던 그녀는 자발적 외톨이였다. 손가락질을 좋아하는 사회 때문에 생긴 외모 컴플렉스로 스스로를 방에 구속한 것이다. 그리고는 나름의 대화 상대를 찾아 미모의 여인으로 자신을 위장하고 미니홈피를 운영한다. 그런데 어느 누리꾼이 신상을 털어서 그녀의 얼굴을 만천하에 공개해버린다. 그녀의 어여쁜 온라인 생활은 송두리째 박살난다.

자의든 타의로든,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혼자 지내던 두 사람은 삶의 전부라고 믿었던 것마저도 잃게 된다. 섬에서 쫓겨난 김씨는 희망을 잃고 63빌딩으로 향한다. 그를 지켜보던 또 다른 김씨는 깨닫는다. 자신에게는 아직 '김씨'가 있다는 것을. 삶을 포기하려는 절망 속에서 여자는 남자를 붙잡는다. 목적과 방향을 잃고 표류하던 김씨가 그녀에게, 그리고 그에게 살아야 할 이유가 되어준 것이다. 세상에 등 돌렸던 두 사람의 만남은,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눈물겹다.

영화 <김씨표류기>는 천만 명이 살아가는 도심마저도, 경쟁의 탈을 쓴 이기주의와 비교를 일삼는 야만성 아래에서 무력한 개인에게 무인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스팔트가 깔린 현실의 서울은 영화 속 김씨가 맨발로 서있던 모래섬과 비슷해 보인다.

만남이 손쉬운 만큼 헤어짐도 한번의 클릭으로 가능한 SNS보다, 연락처조차 주고받지 못했던 '두 김씨의 대화'는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기에 절실하고 애틋했다. 먼 거리를 사이에 두고 그들이 보여준 모습은, 우리가 잊은 채 살아가는 '소통'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오늘도 한국의 어디선가 무인도 같은 나날을 버텨내고 있는 또 다른 김씨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외로워서 도움(HELP)이 필요한 당신에게도, 따뜻한 인사(HELLO)를 건네며 진심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함께하기를.

김씨표류기 정재영 정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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