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트릭스> 연작으로 세계를 흥분시킨 워쇼스키 남매가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가지고 돌아왔다. 형제였던 그들 가운데 형이 성전환 수술로 라나 워쇼스키가 되었고, 여기에 티크베어 감독이 추가되어 세 사람이 만든 영화가 <클라우드 아틀라스>다. 동명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는 21세기 인간조건과 미래세계를 다채롭게 성찰한다.
<매트릭스> 전편에는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적인 전망과 인간의 구원 가능성이 깔려 있었다. 그런 면에서 <클라우드 아틀라스>가 어떤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500년 가까운 시간과 거기 연동된 공간을 무시로 넘나들면서 기상천외한 사건으로 넘쳐나는 <클라우드 아틀라스>. 잠시 그 세계로 들어가자.
문명비판 : 1974년 핵발전소와 오일쇼크 그리고 문명 이후
▲<클라우드 아틀라스>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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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둘러싼 사회적 환경, 달리 말하면 문명의 본질과 외양을 비판적인 관점으로 투시한다는 점에서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1849년의 대항해시대는 18세기 계몽주의를 경과하면서 탄생한 산업혁명을 근저로 한다. 이른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신화가 만들어진 빅토리아 왕조시기.
제국의 이면에는 노예제도가 있으며, 그것은 아메리카의 남북전쟁(1861-1865)에서 정점에 이른다. 백인 우월주의와 제국주의의 발호, 식민지쟁탈로 인한 약육강식의 시기에 대한 사변적인 태도가 그려진다. 자연과학과 실증주의가 득세하면서 평등주의자 어윙은 의학에 대한 과도한 신뢰로 죽음 직전까지 몰린다. 과학은 만능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제3장에서 그려지는 1974년과 핵발전소의 어두운 배후에는 석유에 기초한 현대문명의 위기적 징후가 자리한다. 1973년 10월에 발발한 제4차 중동전쟁으로 야기된 '오일쇼크'로 인한 전 지구적인 에너지 위기는 원자력에 대한 의존도를 수직 상승시킨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핵발전소 증설과 거기서 파생하는 전 인류의 절멸위기이다.
제6장의 문명 이후의 세계는 인간에게 허여되었던 모든 문명이 철저하게 파괴된 이후의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인간의 육체적인 힘과 원초적인 본능만이 생생하게 살아서 인육을 먹고 인간의 피를 마시는 극한적인 야만의 시간과 공간이 드러난다. 어쩌다 인간이 저 지경에까지 몰리게 되었는가, 하는 시사점을 영화는 실감나게 재현한다.
윤회 : 인연설 내지 연기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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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아틀라스>가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영화가 윤회사상에 상당 부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불교의 환생을 들먹이지 않아도 우리는 윤회에 익숙하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시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전자는 <님의 침묵>에서 후자는 <알 수 없어요>에서 인용한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 거자필반(去者必反)'이라는 회자정리(會者定離)에 기초한 시가 <님의 침묵>이고, 돌고 도는 윤회에 터를 둔 시가 <알 수 없어요>다. 따라서 이런 시를 암송하는 한국인들에게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결코 낯선 영화가 될 수 없다.
제1장의 주인공 어윙은 노예제도에 반대하고, 흑인노예의 생명을 구해주려는 인물이다. 어윙의 장인은 사위를 비난하면서 "자네가 뭘 하든 무한한 바다 속의 물방울 하나보다 못해"라고 비웃는다. 그러자 어윙은 "바다는 수많은 물방울들의 집합이 아닌가요?"라고 응수하면서 대양을 향해 초개 같이 몸을 던진다. 그의 아내 틸다가 그를 동반한다.
제5장 2144년 네오 서울에서 어윙은 장혜주로 거듭난다. 혜주는 인간의 탐욕을 채워주기 위해 무한 복제된 클론의 편에 서서 싸운다. 그가 죽음을 무릅쓰고 구해주려는 클론은 손미 451인데 그녀는 제1장에서 등장했던 틸다이다. 300년을 사이에 두고 어윙 부부는 인간과 클론으로 환생하여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는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다.
착취와 피착취: 끝없는 충돌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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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 공산제 사회를 지나 계급이 탄생한 이후 인간은 끝없이 다른 인간을 착취해왔다. 착취와 피착취의 연면 부절한 역사 위에 인간의 자취는 만들어졌다. 이것은 영화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1936년 스코틀랜드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제2장의 이야기는 유명 작곡가에게 의지해야 하는 천재적인 작곡가 로버트 프로비셔의 비극적인 생을 다룬다.
인간착취의 지극한 형식이 전쟁이고, 그것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세계대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펼쳐지는 동성애의 음울하고 슬픈 결말과 생존을 위한 자발적인 피착취의 굴레 속에서 <클라우드 아틀라스 6중주>가 작곡되기에 이른다. 누군가는 빼앗고 누군가는 빼앗기며 세상은 외견상 평온하게 유지되고 굴러간다.
이런 점은 2012년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다섯 번째 이야기에서도 변주된다. 이야기는 졸부가 된 출판업자 캐번디시의 황당한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된다. 돌고 도는 돈의 순환 속에서 잠시 황홀했던 주인공이 빠져드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는 장면은 현대의 많은 것을 돌아보도록 한다. 보호시설이란 명목으로 인간의 인간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과 억압, 굴종이 얼마나 일반화되었는지 생각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착취와 피착취가 가장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려져 있는 다섯 번째 이야기는 참혹하기 그지없다. 수명이 다했거나 더 이상 쓸모가 없는 클론들을 거꾸로 매달아 인간의 일용할 양식으로 활용하는 끔찍한 장면이 우리를 전율케 한다. 도살장이나 정육점에 널려 있는 소와 돼지를 방불케 하는 복제인간들의 대열이 가져다주는 몸서리나는 장면이라니!
인간의 미래 : 미래의 인간은 행복할 것인가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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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그려지는 장면들은 섬뜩하고 우울하며 구슬프다. 웃음과 안온함, 평온함과 만족감을 주는 장면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객석에서 터지는 것은 웃음이 아니라, 신음과 놀람의 소리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비극적이라거나 파괴적인 면을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디스토피아의 전형이라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외려 그 반대다!
야만적인 코나 부족의 살육에 맞서서 영웅적인 투쟁을 전개하는 자크리의 용기는 우리를 감동시킨다. 처음에는 나약한 겁쟁이로 그려지는 인물이지만, 시간과 더불어 그는 저항과 반역을 꿈꾸면서 마침내 그것을 실현하기에 이른다. 그런 행복한 결말은 세 번째 이야기에서 그가 도와주었던 여기자 레이의 환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그들은 인간문명이 완전히 절멸된 다른 행성 어딘가에서 자연 상태로 살아간다. 하지만 그들은 불편하거나 쓸쓸하거나 괴로운 표정이 아니다. 반대로 속도와 무한경쟁과 약육강식의 비인간적인 야만의 시대와 작별한 홀가분한 표정이다. 주어진 소박한 일상의 나날을 향수하면서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며 행복으로 넘쳐나는 생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클라우드 아틀라스>는 제2장과 3장, 그리고 제5장을 제외한다면 행복한 결말을 가진 영화라 할 수 있을 듯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하여 감연히 떨치고 일어서는 어윙, 보호시설을 탈출하여 자유를 찾는 캐번디시, 그리고 잔학무도한 코나 부족을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자크리. 이렇게 본다면 우리네 인생살이는 일장의 희비극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글을 마치면서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NEW
"우리의 삶은 우리 것이 아니다. 자궁에서 무덤까지 타인들과 묶여 있고, 우리가 저지른 악행과 우리가 베푸는 선행이 새로운 미래를 탄생시킨다."
지금과 여기를 살아가지만 인생을 탕진하거나 탐욕에 빠져들거나 사악한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왜냐하면 타고난 업(카르마)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은 다시 태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재탄생하게 될 때 우리는 전생의 업에 따라 너무도 다른 외양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작은 행동 하나가 수백 년 뒤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할지 모른다.
문제는 우리에게 허여된 삶의 근본적인 주재자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개별적인 주체나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의 물방울처럼 고유하고 독특하지만,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뒤섞인다. 그리하여 바다라는 거대한 종착점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서로 만나고 투쟁하고 사랑하며 타인과 강박되어 있는 것이다.
너는 너 혼자가 아니고, 나는 독자적인 내가 아니다. 나와 너, 우리와 너희는 언제나 함께 해야 하는 야누스의 두 얼굴이다. 이것이 인간인 우리가 짊어진 불가피한 운명이다. 그러니 그대들이여, 사랑하라! 사랑하고 또 사랑하라! 죽음이 찾아올 최후의 그 시각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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