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가 2011년, 서른 번째 시즌을 맞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울고 웃고 환호하고 분노했던 그 서른 해를 기념하고 되새겨 보고자 한다. 해마다 함께 기억할 만한 경기의 한 장면을 뽑고, 그것을 단면 삼아 그 시대의 한국야구를 재조명해보고자 기획을 마련했다.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던 1982년부터 시작해 한 주에 한 해씩, 30주 동안 이어진다. - 기자말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동안 너무 게을렀던 게 아닌가 하고 반성했어. 그래서 더 열심히 뛰었지. 뛰면 뛸수록 더 아팠지만, 그럴수록 더 강하게 뛰어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렇게 나 자신과 어리석은 대결을 벌이다가, 결국 제대로 쓰러지고 말았던 거지."

'불사조' 박철순은 1982년 겨울의 한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프로원년이었던 그 해 24승을 올리며 팀의 원년 우승을 이끌었지만 곧 심각한 허리 디스크로 쓰러진 그의 지긋지긋한 15년간의 사투가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몸이란 결국 정신의 지배를 받기 마련'이라는 시대적인 신념 속에 숨어 있던 치명적인 오류의 덫에, 한국프로야구가 배출한 첫 번째 별이 크게 걸려 넘어지던 순간이었다.

한국야구가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프로출범 이전까지 야구선수들은 흔히 '몸 관리'보다도 '인간관계 관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그래서 운동보다는 경조사를, 보약보다는 술자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서른 넘어서까지 유니폼을 입는 것은 고달픈 신세라고 생각하던 실업야구 시절에는 선수의 몸 역시 '썩어지면 흙이 될 것'에 불과했고, 굳이 몸을 아껴가며 한 해라도 더 오래 뛰는 것보다는 '화끈한 투지와 책임감과 희생정신'을 발휘해 조직과 주위의 인정을 받는 것이 곧 시작될 본격적인 직장생활에 보탬이 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야구를 단지 은행이나 대기업에 취업하는 도구 이상으로 생각해 어깨에 보험을 든 최동원이나, 술 담배는커녕 커피조차 입에 대지 않았던 이만수 같은 젊은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야망은 종종 물정 모르는 풋내기의 철없는 짓으로나 여겨지곤 했다. 반면 '하면 된다'는 시대적 슬로건은 운동선수들에게 더 깊이 영향을 미쳐 먹고 자고 쉬고 치료하는 일의 중요성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이후로도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연봉협상이 시작되면서 '몸이 재산'이라는 인식이 생기긴 했지만, 그 재산을 지키고 불려줄 노하우까지 뚝딱 생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일교포 투수들이 '얼음찜질'이라는 것을 전수해주기 전까지는 경기를 마친 투수들이 열이 올라 벌겋게 충혈된 어깨를 뜨끈한 열탕에 담가 모세혈관들을 두 번 죽이는 미련한 짓을 되풀이하기도 했던 것이다.

프로야구, 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병상의 임수혁 4분 내에 조치를 했다면 살릴 수 있었던 임수혁은 십분여만에 병원에 도착했고, 그 5분 남짓한 시간은 그를 10년이나 병상에 누워있게 했다.

▲ 병상의 임수혁 4분 내에 조치를 했다면 살릴 수 있었던 임수혁은 십분여만에 병원에 도착했고, 그 5분 남짓한 시간은 그를 10년이나 병상에 누워있게 했다. ⓒ 김진석


2000년 4월 18일에 벌어진 일 역시 한국야구의 여전히 미개했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날 대한민국 최대, 최고의 야구장인 잠실 야구장에서 서울 팀 LG 트윈스와 부산 팀 롯데 자이언츠가 맞붙는 빅이벤트가 열렸고, 2회 초 2루에 나가있던 주자가 갑자기 쓰러져 호흡과 심장박동을 멈춘 채 다리를 떨기 시작했다.

지병인 심장부정맥 때문에 순간적으로 뇌에 산소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벌어진 일이었고, 당장 필요한 것은 심장이 다시 뛰어 숨을 들이쉬게 만들기 위한 심장마사지와 인공호흡이었다. 하지만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은 허리띠를 풀어주고 '들것'을 외치는 것 뿐이었다.

곧 들것과 함께 구장에 대기하던 단 한 명의 응급요원이었던 간호사가 도착했지만, 그녀는 '다른 선수나 공과의 물리적 접촉이 없이 쓰러진 채 다리를 떤다'는 점에 주목해 '간질발작'을 의심하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게다가 들것에 실려 흔들리며 야구장 밖까지 옮겨진 임수혁이 태워진 구급차에는 그 순간 그에게 꼭 필요했던 심폐소생기가 없었다.

결국 가장 중요하다는 '초기의 4분'을 훌쩍 넘겨 십 분 이상이 흐른 뒤 도착한 병원에서는 심장과 호흡을 살리는 것 이상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임수혁은 의식을 잃은 채 10년을 병상에서 버텼고, 결국 지난 2010년 2월 7일 눈을 감고 말았다.

임수혁을 잃고, 외양간이 고쳐지다

"집이 잘 살아서 그렇기도 했지만, 워낙 따뜻한 사람이었어요. 늘 밥값 술값 혼자 다 내는 건 유명한 얘기였고, 그 험하다는 고려대 야구부에서도 후배들에게 손 한 번 대지 않고 얼굴 한 번 붉히지 않는 선배였어요.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죠."

고려대와 상무를 거쳐 롯데 자이언츠에서도 한솥밥을 먹었던 한 살 터울의 후배 마해영은 임수혁을 그렇게 기억했다. 유복했고, 따뜻했고, 그래서 그늘진 구석이라곤 없는 듯 했던 사람. 하지만 무릎을 다친 서른 무렵부터는 선수로서의 입지가 급작스레 좁아지기 시작했고, 1999년에는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비닐하우스로 나앉는 일까지 벌어지며 벼랑 끝으로 몰리게 되고 말았다.

그런 임수혁은 심장부정맥이라는 치명적인 지병을 애써 드러낼 수 없었고, 그렇게 수많은 선수들이 각자의 삶과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감수하는 크고 작은 위험들에 대비할 능력과 의지를 한국프로야구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롯데가 자랑했던 걸출한 공격형 포수이며, 1999년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의 영웅 임수혁은 그렇게 쓰러졌다.

임수혁이 쓰러진 후, 많은 것이 변했다. 구급차가 언제라도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경기중에는 전문의가 대기했으며, 혹서기에는 더블헤더를 치르지 않도록 규정이 고쳐지기도 했다. 그리고 멀게는 선수협의회가 만들어져 부족하나마 선수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씨앗이 뿌려진 것도 그 날이었다.

임수혁 선수의 영정 쓰러진 지 10년만인 지난 2010년 2월 7일 오전 8시. 임수혁은 눈을 감았다.

▲ 임수혁 선수의 영정 쓰러진 지 10년만인 지난 2010년 2월 7일 오전 8시. 임수혁은 눈을 감았다. ⓒ 롯데 자이언츠


행복을 사는 팬들, 목숨을 거는 선수들

한국야구는 더디게나마 발전하고 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선수들의 몸에 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이다. 투수가 마운드 위에서 스스로 교체를 요청했다가 '책임감 없는 나약한 정신자세'를 질타 받던 시절이 문득 지나가 버렸고, 이제 '선수 혹사'에 관한 혐의가 감독에 대한 가장 격한 비난의 소재로 활용되는 시절이 온 것만 보더라도 그렇다.

하지만 그런 발전의 한 계기가 불과 10년 전에 벌어졌던 끔찍한 사고였다는 점을 곱씹어본다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소를 잃고라도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칭찬할 일이지만, 잃고 나서야 고치기를 되풀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프로야구는 30년 전 '꿈과 낭만'을 내걸고 출범했고, 우리는 오늘도 야구장에서 행복을 산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은 누군가에게 치열한 생존경쟁의 철창이며, 언제나 뛰고 싶고, 이기고 싶고, 성공하고 싶어 몸서리를 치는 격한 젊은이들이 부대끼는 전쟁터다. 그리고 그런 모순된 진실을 통찰할 때에야 야구는 비로소 삶의 감동을 줄 수 있다.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가 자랑했던 공격형 포수, 그리고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을 가능하게 했던 '한 방'의 영웅. 하지만 임수혁의 죽음은 의미있는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 임수혁 롯데 자이언츠가 자랑했던 공격형 포수, 그리고 1999년 롯데 자이언츠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을 가능하게 했던 '한 방'의 영웅. 하지만 임수혁의 죽음은 의미있는 변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 롯데 자이언츠


임수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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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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