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7일에서 30일까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인권영화제가 열렸다. 자유·평화, 소수자, 자본·저항, 빈곤·노동 등 매일 다른 테마를 갖고 총 29편의 영화가 상영됐다. 소수자의 날인 지난달 28일 서늘한 저녁, 영화제 현장을 찾았다.

우여곡절 끝 개최된 인권영화제

 제14회 인권영화제의 주제는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로니에 공원 앞에 걸린 현수막

제14회 인권영화제의 주제는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마로니에 공원 앞에 걸린 현수막 ⓒ 박솔희


나는 뭔가에 이끌리듯 인권영화제에 가보고 싶었다. 혜화역을 나와 마로니에 공원으로 발걸음을 떼는데, 멀리서 <당신이 다른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라고 쓰인 그 현수막이 보였다. 그 순간 왠지 울컥해 버렸다. '아, 그런가. 다른 생각 때문인가.'

인권영화제가 15주년에 이르기까지(중간에 5.5회가 있어서 14회지만 15주년이 된다)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고 한다. 1996년 '영화 속의 인권, 인권 속의 영화'라는 주제로 인권영화제가 처음 개최된 이후 재정적 어려움이나 외압 등을 견뎌야 했고 2008년부터는 상영관을 내주지 않는 이명박 정부 탓에 거리상영을 하게 됐다.

지난 두 해 동안은 청계광장에서 개최했지만 그도 쉽지는 않아서 작년에는 경찰의 봉쇄 속에서 간신히 영화제를 지켜냈다. 올해는 월드컵 때문에 마로니에 공원으로 장소를 옮겼다.

소박하게 인간의 기본권을 논하는 것이 어째서 이렇게 힘든지, 도대체 우리는 왜 서로의 다른 생각을 용인하지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갖고 이를 표현할 자유를 갖지 못하는지 참 답답하다. 아마도 그게 내가 울컥한 이유였을 거다.

생애 최초 VIP 대접에 섬세한 자막처리 센스

 인권영화제의 모든 의자는 VIP석이다.

인권영화제의 모든 의자는 VIP석이다. ⓒ 박솔희


 GV 시간,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앞에서 하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자막처리해준다.

GV 시간,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앞에서 하는 이야기를 실시간으로 자막처리해준다. ⓒ 박솔희


VIP석에 앉아서 영화를 본 일이 있는가. 좌석 등받이마다 '사람은 모두 VIP입니다'라는 종이가 붙어 있었다. 역시 인권영화제답다. 처음 받아보는 VIP 대접에 '인권 감수성'이 풍부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시설장애인의 역습> 상영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가 진행 중이었다. 인권영화제의 센스를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었는데, 바로 발언 내용을 실시간으로 스크린에 자막 처리해주는 것이었다. 청각 장애인을 배려한 것이다. 또 한 번, 감동.

게이 커플이 직접 카메라 든 <지난 겨울, 갑자기>

 영화 <지난 겨울, 갑자기> 포스터

영화 <지난 겨울, 갑자기> 포스터 ⓒ 지난겨울,갑자기

내가 본 영화 <지난 겨울, 갑자기>는 남성 동성애자 커플 두 사람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유럽은 동성애에 대해서 우리보다 진보적이리라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특별히 사정이 낫지도 않아 보였다. 아마 가톨릭 전통이 깊은 이탈리아가 배경이라서 그랬을지 모르겠다.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며 8년간 동거하던 구스타프와 루카 커플. 하지만 어느 겨울, 동성의 동거인들에게도 부부로서의 권리를 보장하자는 내용의 '디코(DICO)' 법안이 정부에서 뜨거운 감자가 된다. 그 결과 두 사람의 사랑은 정치·사회적 화두가 되었고 이들 커플은 거리로 나서 사람들의 목소리를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두 사람이 서로를 보듬던 따뜻한 눈빛에 비해 세상의 시선은 생각보다 차가웠다. "동성애는 정신병", "신의 섭리에서 벗어난다"…. 심지어는 "동성애자 부부에게 자녀가 있다면 아이를 '구출'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야멸찬 말들에 두 사람은 상처를 받지만 현실을 피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생은 아름다워> 등 동성애자가 등장하는 드라마로 인해 관련한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는 참이다. 게다가 최근 게이 친구들을 몇 명 사귄 나로서는 구스타프와 루카 커플을 적극 지지하며 영화를 봤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필름에 담아낸 두 감독의 작업이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욕하는 말들도 영화에 그대로 들어갔다. 두 감독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제14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제14회 인권영화제 포스터 ⓒ 인권영화제

밤바람이 쌀쌀했지만 끝까지 영화를 봤다. 영화는 그 날의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VIP석에서 일어났다. 영화 관람은 모두 무료였지만 조금 후원을 하고 싶은 마음에 티셔츠를 샀다. 티셔츠 한 장 값으로는 비싼 1만 원이었지만 영화 관람료와 세상의 모든 소수자를 향한 지지의 마음이 포함된 걸로 생각했다.

지하철역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마음은 촉촉했다. 마침 역 앞에서 꽃을 팔고 있었다. 신문지에 둘둘 만 노란 장미 열 송이를 2천 원에 샀다. 평소 뜯어먹지도 못하는 꽃을 자주 사는 건 아니지만 나 자신에게도 무언가 소박한 선물을 하나 하고 싶었다.

왜냐면 나도 때로 소수자니까. 나는 다른 생각을 가졌으니까. 우리는 상대적으로 다수가 되기도 하고 소수가 되기도 한다. 우리 모두가 가진 각기 다른 생각들이 작아질 필요 없는 날이 오면 좋겠다. 내 장미들은 작고 시들했다.

 헤화역 2번 출구 앞에서 산 노란 장미 열 송이

헤화역 2번 출구 앞에서 산 노란 장미 열 송이 ⓒ 박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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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없는 곳이라도 누군가 가면 길이 된다고 믿는 사람. 2011년 <청춘, 내일로>로 데뷔해 <교환학생 완전정복>, <다낭 홀리데이> 등을 몇 권의 여행서를 썼다. 2016년 탈-서울. 2021년 10월 아기 호두를 낳고 기르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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