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다섯 시즌동안 1500경기를 뛰며 1342개의 안타를 때려낸 통산타율 .284의 타자. 그래서 어느 부문으로 따져보든 공격부문 통산랭킹 20위권 내에는 대개 이름을 올리는 선수. 그러나 그런 만만치 않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장원진이라는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만은 않다. 그 역시 너무 오래, 너무 묵묵히, 너무 은근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게를 떠받쳐온 수수한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무난한, 그러나 흔하디 흔한 재목

장원진의 타격자세 특별히 눈길을 끄는 수비력이나 센스, 혹은 장타력도 가지지 못한 흔하디흔한 선수중의 하나가 그였다. 그가 고교시절부터 스위치히터 연습을 했던 것 역시, 스스로도 뭔가 별난 것 하나를 만들어야 팔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 장원진의 타격자세 특별히 눈길을 끄는 수비력이나 센스, 혹은 장타력도 가지지 못한 흔하디흔한 선수중의 하나가 그였다. 그가 고교시절부터 스위치히터 연습을 했던 것 역시, 스스로도 뭔가 별난 것 하나를 만들어야 팔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 두산 베어스 팬북


그는 학생 시절에도 딱히 빛나던 재목은 아니었다. 그가 종종 들었던 '맞히는 재주는 있다'는 칭찬은 사실 '영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이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고, 특별히 눈길을 끄는 수비력이나 센스, 혹은 장타력도 가지지 못한 흔하디 흔한 선수중의 하나가 그였다. 그가 고교시절부터 스위치히터 연습을 했던 것 역시, 스스로도 뭔가 별난 것 하나를 만들어야 팔리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과 무관하지 않았다.

인천 토박이로 인천을 떠난 적이 없었던 그가 프로무대에 들어서며 고향을 등져야 했던 것도 그 어중간한 실력 때문이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해만큼은 인천에 이상하리만치 좋은 신인이 많았다. 해마다 선수 기근에 시달리던 고향팀 태평양 돌핀스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1차 지명으로 정민태를 잡은 뒤로도 인천고 동기 권명철과 김미호, 동산고 출신의 임창식, 장광호가 차례로 앞 순위 지명을 받았고, 장원진은 OB베어스의 2차 지명 다섯 번째 순위로 간신히 프로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해태나 태평양 같은 팀들이 이미 지명 테이블을 걷어버린 뒤, 그나마 자금이 넉넉한 구단이 줍듯이 찍은 선수에게 큰 기대를 걸었을 리도 없었다. 대학 시절 주로 1루수로 뛰었지만 김형석과 김종석이 자리잡고 있는 베어스의 1루를 넘볼 처지는 아니었고, 김상호, 김광림, 강영수 같은 대타자들이 지키고 있던 외야에서도 만년 후보자리를 넘어서기 쉽지 않았다.

1995년에는 김광림과 강영수가 쌍방울과 태평양으로 각각 트레이드된 틈을 타서 간신히 외야수로서 기회를 얻는 듯했지만, 길게 버티지는 못했다. 시즌 뒤 방위병으로 입대한 장원진이 96년부터 내려진 국방부의 '방위병 출장금지' 조치의 첫 대상자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병역 때문에 선수생활의 공백기를 가져야 했던 첫 케이스였던 셈이다. 힘들게나마 홈경기만이라도 나서며 경기감각을 조율해 선수생활 후반기를 노리려던 계획은 허무하게 무너졌고, 그는 퇴근 후 잠실구장에서 혼자 배트를 휘두르며 아주 현실적인 절망감과 싸워야 했다.

97년 시즌 중반에 팀으로 복귀하긴 했지만, 그 사이 사정은 더 힘들게 굴러가고 있었다. 그 사이 최고의 발을 가진 정수근과 최고의 어깨와 장타력을 겸비한 심정수가 외야의 두 자리를 삼켜버렸고, 슈퍼루키 김동주 또한 외야수와 지명타자를 겸하며 기존의 김상호와 자리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김형석에 이어 98년부터 역대 최고의 외국인타자 우즈가 아성을 쌓은 1루 쪽은 돌아볼 것도 없었다.

장원진이라는 어중간한 선수가 나이 서른 줄에 오르도록 제자리도 찾지 못한 사이 팀은 기다려주지 않고 정수근이라는 사상 최고의 톱타자에 이어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라 불리는 역대 최강의 클린업트리오를 완성시킨 채 당대 최강의 팀으로서 출항하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상황, 단 한 번의 기회

기회가 온 것은 99년이었다. 시즌 초반 케세레스가 유니콘스 김인호의 저돌적인 슬라이딩을 피하지 못하고 충돌해 부상을 당하며 2루에 구멍이 뚫리자 안경현을 2루로, 김동주를 3루로 돌리는 연쇄이동 조치가 불가피했고, 엉뚱하게도 노쇠기미를 보이던 김상호마저 트레이드해버리면서 비어버린 외야 한 자리, 그리고 타선에서는 정수근과 '우동수' 사이의 공백으로 남아있던 2번 타순의 기회가 장원진에게 주어졌다. 그의 선수생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유일한 행운이었다.

최고의 2번 타자 장원진은 90년대 초반 삼성의 동봉철과 더불어 손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였다. 그는 최고의 선두타자와 최강의 클린업 사이의 불모지에서 왼쪽과 오른쪽 타석을 넘나들며 때로는 번트로, 때로는 기습적인 스윙으로 만들어낸 안타로, 또 때로는 노골적인 풀스윙으로 엮어내는 장타로 경기의 흐름을 쥐고 흔들며 자신만의 공간을 개척해냈다.

▲ 최고의 2번 타자 장원진은 90년대 초반 삼성의 동봉철과 더불어 손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였다. 그는 최고의 선두타자와 최강의 클린업 사이의 불모지에서 왼쪽과 오른쪽 타석을 넘나들며 때로는 번트로, 때로는 기습적인 스윙으로 만들어낸 안타로, 또 때로는 노골적인 풀스윙으로 엮어내는 장타로 경기의 흐름을 쥐고 흔들며 자신만의 공간을 개척해냈다. ⓒ 두산 베어스 팬북


정말 경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2번 타자다. 평범한 2번 타자가 경기 초반부터 어김없이 굴려대는 보내기번트는 경기의 흐름을 무뎌지게 만들지만(물론, 보내기번트를 성공시켜줄 거라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2번 타자라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박진감을 선사하기도 한다만), 안타생산능력과 투지를 겸비한 2번 타자가 들이미는 번트자세는 다음 순간에 대한 호기심에 날을 세우는 시한폭탄이다.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의 몇 년간, 장원진은 90년대 초반 삼성의 동봉철과 더불어 손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였다. 그는 최고의 선두타자와 최강의 클린업 사이의 불모지에서 왼쪽과 오른쪽 타석을 넘나들며 때로는 번트로, 때로는 기습적인 스윙으로 만들어낸 안타로, 또 때로는 노골적인 풀스윙으로 엮어내는 장타로 경기의 흐름을 쥐고 흔들며 자신만의 공간을 개척해냈다.

그는 주전 첫 해인 99년 11개의 희생번트를 대면서도 135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3할 타율에 올라섰고, 특히 그의 선수인생 절정기였던 2000년에는 무려 170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부문 타이틀을 따낸 것을 비롯해 94개의 득점과 59개의 타점, .323의 타율로 4년만에 팀의 한국시리즈행을 이끌기도 했다.

공포의 바가지안타

그는 당대의 투수들이 가장 꺼려하는 타자였다. 동체시력과 배트스피드를 타고난 천재형은 아니었지만, 우직한 단련으로 단단해진 손목힘과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달려드는 끈끈한 타격은 엄청나게 많은 파울을 양산했고, 다시 짜증이 나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로 많은 '바가지 안타'(빗맞은 타구가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공간에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행운의 안타)를 만들어냈다. '바가지 안타'란 물론 운의 힘을 많이 받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운은 강한 손목힘과 좋은 타격후동작(follow through), 그리고 강한 집중력과 근성을 가진 타자에게 자주 찾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날다람쥐 같은 정수근을 주자로 내보낸 투수는 다음 타자인 장원진에게 감히 변화구를 던지지 못했고, 호랑이 같은 '우동수' 앞에 주자를 쌓아둘 수도 없어 그냥 내보내지도 못했다. 어쨌든 승부를 보자고 진땀 닦아내며 던지는 결정구는 모조리 파울로 흘려보내다가, 조금만 몰렸다 싶은 순간 약 올리듯 좌익수와 3루수, 유격수 사이에 절묘하게 떨어져 탁구공처럼 휘어 달아나는 안타를 '깎아내면' 이미 선행주자는 3루에 들어가고, 타석준비석에는 우즈, 김동주, 심정수가 저승사자처럼 늘어서 한껏 길게 뽑아쥔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또 한 경기의 흐름을 끌어당기곤 했던 것이다.

반달곰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선수

2001년에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고지에 선 이후 베어스는 몇 해 동안 주춤거리기도 했다. 우즈는 전같지 못했던 2002년 시즌을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갔고, 심정수는 2001년을 함께 하지도 못한 채 선수협파동 와중에 심재학과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했다. 시름시름하던 유격수 김민호가 본격적으로 주저앉으며 내야에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희망도 있었지만 위기감과 상실감이 더 컸던 그 무렵, 장원진은 입단동기 안경현과 더불어 베어스의 기둥이었다. 물론 정수근과 김동주가 건재했고 홍성흔이 분발했지만, 성실한 훈련을 바탕으로 한 기복 없는 활약과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공으로 내뿜는 파이팅의 두 고참이 없었다면, 최소한 '뚝심의 팀' 베어스라는 공식은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흔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도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기본으로 2할8푼 이상을 치던 방망이가 2006년에는 2할5푼대로 떨어졌고, 2007년에는 그나마 대타로만 23경기에 나서 1할대를 넘기지 못하는 성적을 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된 올해는, 비록 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긴 했지만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않은 채 코치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 플레이오프 때는 대타로 나선 단 두 번의 기회에서 두 개의 안타로 두 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날카로운 면모를 과시했고, '벤치의 파이팅'이 가장 큰 역할을 해온 베어스에서 그는 경기에 나서든 아니든 여전히 핵심전력이다.

둥글둥글한 체형에 사람 좋은 얼굴, 특히 반달곰 유니폼이 꼭 어울리는 타격자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꾸준함과 뚝심의 팀' 베어스를 그대로 상징하는 듯 가장 꾸준하고 뚝심있게 팀을 떠받친 2번 타자. '장샘'이라 불리는 사나이. '신'이나 '포' 같은 거창하다 못해 호들갑스런 글자 대신 '샘'이라는 정감어린 글자가 별명으로 붙은 것부터가 참 '베어스적인' 인물이 바로 장원진이다.

장원진 만만치 않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장원진이라는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만은 않다. 그 역시 너무 오래, 너무 묵묵히, 너무 은근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게를 떠받쳐온 수수한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 장원진 만만치 않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장원진이라는 이름을 알고 기억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만은 않다. 그 역시 너무 오래, 너무 묵묵히, 너무 은근하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게를 떠받쳐온 수수한 기둥이었기 때문이다 ⓒ 두산 베어스 팬북


장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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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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