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할리우드에선 대기업들이 악역으로 맹활약중입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악당은 인간을 멸종시키려는 기계들이지만 그 기계들의 모태가 되는 것은 '사이버다임'이라는 욕심 많은 방위산업체(?)입니다.
공산당이 없어졌으니 <007 네버 다이>처럼 루퍼트 머독 분위기의 신문사 회장님이 전쟁을 일으키고 아무리 봐도 빌 게이츠를 닮은 <패스워드>의 CEO는 프로그램 표절하려고 킬러를 보내 살인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얄궂은 것은 기업이 악역을 맡는 경우 요즘 새롭게 부자가 된 CEO들이 주로 악당이 된다는 것입니다. 할리우드는 옛날 자본가들이나 세습 부자들에겐 오히려 좀 관대한 면이 있습니다. 관찰 범위를 악당이 없는 영화들로 넓혀 보면 부자, 자본가, 재벌 같은 태그로 분류되는 캐릭터들은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오히려 순진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로 그려지면서 알고 보면 외로운 사람 같은 식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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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유행어로 표현한다면 ‘추억의 미드’ <아빠는 멋쟁이>. 백만장자라는 특수한 배경에 미국 가정의 일상사를 담는 것도 미국 대중문화의 소화력일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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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외화 시리즈 <아빠는 멋쟁이> 기억하시는 분들 계실 겁니다. 이 드라마의 원제는 < Silver Spoons >로 '입에 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부자로 태어나다', '팔자 좋다'쯤 될 것입니다. 백만장자 아빠와 함께 살게 된 어린 아들이 나오는 이 드라마에서 부자라는 것은 그냥 배경일 뿐 가족 사이에 벌어지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주된 내용입니다. 돈이 무지 많다는 것은 그냥 '편리함' 정도로 그려집니다.
옛날 자본가나 세습 부자에게 관대한 할리우드어려서는 그냥 신기하게만 보였던 백만장자라는, 그저 배경이요 설정이 지금 생각해보면 좀 그런 점이 있습니다. 무지하게 넓은 집에 아이가 타고 다닐 수 있는 기차를 만들어 놓아 그걸 타고 나타난다거나 집안에 아예 각종 오락기를 가져다 놓은 오락실이 있는 설정들은 양극화가 심했다고 할까요?
그런 빈부격차의 문제가 순수한 아빠, 귀여운 아들과 어우러지면서 그저 배경으로 기분 좋게 처리되는 것이 자본가를 대하는 미국 대중문화의 관대함 또는 까칠하게 말해서 일종의 편향일 것입니다.
재벌이나 자본가가 되면 미녀를 손에 얻고자 하죠. 현실에서는 몇 억을 써서 무슨 영화배우 스폰서를 하네 하는 소문들이지만 영화에서는 이게 또 멋지고 순수하게 처리됩니다. 마릴린 먼로와 이브 몽땅이 출연한 <사랑을 합시다>(1960)에서 연극배우에 반한 백만장자는 극단에 연습생으로 들어가 (극단주에게 돈도 좀 쓰고 전문 교사에게 연기 과외를 받기도 하지만) 밑바닥에서 고생하면서 미녀의 (몸이 아니라?) 마음을 얻기 위해 애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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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 보다는 마음으로? 백만장자의 순수한 사랑 찾기를 그린 <사랑을 합시다>(Let's make love). 물론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극단을 사들이는 등 돈도 많이 들긴 합니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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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합시다>에선 정석대로 일을 처리하게 위해 애쓰는 백만장자가 로맨틱하게 등장하긴 했지만 현실에선 그럴 리가 없겠죠. 로버트 레드포드와 데미 무어의 <은밀한 유혹>(1993)에선 재미로 우연히 만난 부부에게 '당신 부인을 하룻밤 빌려주면 백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이 등장합니다. '추잡한 제안'(Indecent Proposal)이라는 원제를 우리말로는 좀 더 원만하게 다듬어주기는 했습니다만 미국 개봉 당시 여성 단체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했던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데미 무어의 반격이 시작되면서 돈으로 장난치던 부자나 돈 앞에 마누라 내 놓은 남편 모두 애를 먹는 일종의 반전 국면이 이어지고 로버트 레드포드가 연기한 부자 양반은 '얼마면 되겠니?'하던 자신만만한 부자에서 전전긍긍하는 한 남자로 내려앉습니다. 그것도 미남에 매너 맨 로버트 레드포드가 그러고 있으니 지은 죄는 잊혀지고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자본가는 미화되어도 자본가의 무기인 '돈의 유혹'을 드러낸 것에 그나마 할리우드 영화치곤 많이 나간 셈 치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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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부녀와의 하룻밤에 호기롭게 백만 달러를 내 놓는 <은밀한 유혹>. 영화 개봉 당시 여성 단체의 반대 운동에도 직면했지만 영화사는 자체 설문조사에 참여한 여성 중 80%가 ‘백만 달러면 하겠다’는 답을 내 놓았다고 홍보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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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자본가에게 관대한 것은 원래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런 분위기인 탓이겠지만 초기 할리우드 스튜디오들과 자본가들이 나름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에도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로 '기인' 하워드 휴즈를 꼽겠습니다. 하워드 휴즈는 괴짜랄까 불완전한 면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그 스스로 할리우드에 거액을 투자한 인물이어서인지 할리우드 영화에는 나름 신비한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마치 <사랑을 합시다>에서 극단에 투자한 백만장자를 위해 배역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말이죠.
자본가 제대로 묘사한 <도널드 덕>하워드 휴즈를 정면으로 다룬 <에비에이터>(2004)는 '실화'를 강조하고 있지만 하워드 휴즈라는 이름으로 매력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에 가깝습니다. 감독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매섭게 미국을 해부해 왔던 마틴 스콜세지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죠.
<인간 로켓티어>(1991)같은 오락영화에서도 하워드 휴즈는 대통령 특명을 받아 사재를 털어가며 히틀러에 맞설 비밀병기를 개발하는 위엄 있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영화 제작비를 아끼지 않고 스타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리던 이 갑부 양반을 할리우드는 까칠하게 다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늘 좋게 좋게 그려 나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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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비에이터>는 잘 만든 영화임에 분명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하워드 휴즈는 실제 하워드 휴즈와는 멀찍이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괴짜 갑부가 고독한 매력남으로 변신한 배경에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으로 할리우드에 투자했던 그의 경력과도 무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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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개인적으로 꼽아 본다면 자본가를 묘사한 미국 대중문화 작품 중에서 <도널드 덕>에 나온 스크루지 아저씨를 최고로 치겠습니다. 이름이 아예 스크루지인 이 양반은 돈만 밝히고 돈이 그렇게 많은데도 공짜만 좋아합니다. 고생하며 사는 도널드 덕에겐 결코 한 푼도 허투로 쓰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욕하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미워하라지, 나는 모든 사람을 미워하겠어!'같은 명대사 속에는 자본가가 자본가의 모습으로 대략 정직하게 그려지고 있다고 할까요?
어려서 인상 깊게 보았던 <도널드 덕> 만화책의 한 장면이 있습니다. 스크루지 아저씨와 도널드 덕이 같은 식당에 들어가서 같은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스크루지 아저씨가 '성공한 기업가가 먹는 정식'을 시키자 도덜드 덕은 '가난한 노동자가 먹는 샌드위치'를 각각 시켜 먹습니다. 친척 사이라도 자본가와 노동자가 각자 자기가 축적한 자본에 맞춰 밥을 먹는 장면이 너무도 일상적이고 우호적으로 그려지는 모습…, 어쩌면 이것이 부자도 많고 가난한 사람도 많은 나라 미국이 나름대로 굴러가는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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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성하는 자본가의 대표적인 캐릭터 ‘스크루지’를 이름으로 쓰면서도 일관되게 돈의 길을 걷는 스크루지 아저씨(Scrooge McDuck). 돈이 너무 많아서 다 셀 수가 없다 시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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