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람들과 일하면서 '재벌'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난감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들이 보는 신문이나 잡지에 'chaebul'이나 'chaebol'로 고유명사 대접을 받으며 '김치'나 '불고기' 보다 더 한국을 대표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대한민국 재벌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그러니까 너희들 나라에도 있는 대기업 같은 것인데 계열사가 무척 많고 각 계열사들은 대개 해당 분야에서 독점기업이기도 한데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지 않으면서 대체로 친족들이 운영하며 물려받기도 한다고 설명을 하고 나면, 제 발이 저린 도둑이 되어 '그래도 집중된 힘으로 경제 발전에 공로가 많다'는 사족을 붙이곤 하지만 입맛이 씁쓸하죠.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끔찍이 사랑하고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은 전경련이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린다면 '기업하기 좋은 나라'일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기업들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시원하게 악당이 되어주는 그런 존재입니다. 소련이 사라진 뒤로는 더 자주 악역을 맡고 있고 특히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에선 악역 시장을 독점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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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작 <로보캅>은 지금 기준으로는 거친 특수효과들로 이뤄져 있지만 인간의 정체성이라는 문제의식과 화끈한 액션을 잘 버무려 여전히 열혈 팬들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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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보캅>에 등장하는 거대기업 OCP(Omni Consumer Products)는 이름 그대로 모든 것을 다 만들어 파는 회사로 1편에서 디트로이트 경찰 운영권을 인수한 것을 시작으로 2편에선 아예 도시를 소유하고 3편에선 일본 자본에 도시를 팔아 버리기도 합니다. '로보캅'이 OCP 제품인 것은 물론이고 로보캅이 맞서 싸워야 하는 'ED-209'나 '로보캅2'도 OCP 제품이니 OCP는 영화 <로보캅> 시리즈의 주역이자 악역인, 디트로이트를 흔드는 '잘 보이는 손'입니다.
어느 재벌 총수께서는 자기네 기업은 일류인데 정부는 삼류라 했다죠? 그런 일류 기업의 수준으로 치안유지를 하면 백성들 살림살이가 좋아져야 할 것 같은데 OCP가 서비스하는 디트로이트는 오히려 범죄가 끊이지 않는 그런 곳입니다. 원래 공공서비스란 밑져도 투자를 해야 하는 그런 영역이지만 기업이란 결코 밑지는 장사는 하지 않는 존재라 시작부터 결말은 정해진 것이겠죠. 디트로이트 치안에 대한 OCP의 정책은 세 가지 입니다. 원가절감, 원가절감 그리고 원가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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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공서비스가 사기업으로 넘어가자 경찰관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리고 시민들은 갖은 범죄에 시달립니다. 할리우드에선 픽션인데 대한민국에선 비슷한 실화가 많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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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보캅>에 등장하는 경찰관들을 보면 경찰처럼 보이지만 모두 어깨에 OCP 마크를 달고 있습니다. 기업에서 경찰 업무를 맡아 하고 있는 것이니 냉정하게 말한다면 이들은 기업에 고용된 존재들이죠. 영화 속 경찰들은 혹사당하면서도 '경찰관은 파업하지 않는다'며 직업의식을 불태우지만 그런 그들에게 OCP가 내놓는 것은 수당 감축, 대체 인력 투입, 프락치 심기 같은 노동자를 손쉽게 다루는 자본의 꼼수들입니다.
OCP가 로보캅을 만든 이유도 보다 강력한 경찰관이 아니라 '파업하지 않는 경찰관'을 갖고 싶어서였죠. 밥만 제때 주고 기름만 잘 쳐주면 군소리 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로보캅을 만들어 저 골치 아픈 경찰 노동자들과의 단체협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것이 OCP의 희망사항이었습니다. OCP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된다는 창업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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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시 개발로 이익을 보고자 철거 깡패 동원하고 회사 마크 찍힌 장갑차까지 몰고 나타났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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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보캅은 아이작 아이시모프의 '로봇 3원칙'을 변형시킨 근무수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OCP는 로보캅에게 '결코 OCP 간부에게 맞설 수 없다'는 비밀수칙을 입력시켜 놓았죠. OCP 간부는 살인을 하건 무슨 범죄를 저지르건 체포할 수 없습니다. 굳이 재벌 총수인 아빠에게 전화를 걸 필요도 없죠. <로보캅> 1편 마지막 장면처럼 회장님께서 특별히 악당을 해고해 주셔야만 로보캅의 정의도 실현될 수 있습니다만, 이건 정의구현 같기도 하고 정리해고를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한 그런 상황입니다.
로보캅 1편에서 로보캅은 인간성(?)을 되찾고 악당도 해치웠지만 단지 OCP 간부 하나를 해치웠을 뿐 여전히 OCP는 도시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2편에 이르면 신형 로보캅을 만들기 위해 범죄자와 마약도 그냥 원료거니 생각하고 가져다 쓰고, 3편에선 신도시 만든다고 경찰들 해고하고 구사대와 철거깡패에 회사 마크 찍힌 장갑차까지 동원해서 시민들을 내치는 화끈한 기업액션(?)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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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공서비스를 인수한 기업은 비밀리에 자기네 임원에겐 결코 맞서지 못하는 프로그램을 로보캅에 심어 놓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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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로보캅> 시리즈는 화끈한 오락영화입니다만 즐겨 삽입되는 냉소적인 뉴스들처럼 독점기업이 지배하는 미래 사회를 우울하게 묘사하고 있어 몇몇 미국 평론가들은 이 영화를 정치적 텍스트로 대접합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 설마 경찰 같은 공공서비스를 기업이 떠맡는 시대가 올까도 싶습니다만, 이라크 전쟁을 빌미로 전쟁을 대신해 주는 민간군사기업들이 사세를 확장하는 것을 보면 그날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에서 어느 재벌은 멀쩡한 시사잡지 하나를 짝퉁으로 전락시키고, 또 어느 재벌은 법이고 뭐고 없다 직접 쇠파이프를 휘두릅니다. 우리가 재벌 파워에 얼마나 주눅 들었는가 하면 잡지 하나 말려 죽여도 뭐 그러려니 하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도 아빠의 사랑이라고 감탄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기업이 시키는 것만 하도록 만들어졌으나 소속 기업보다 공공의 이익을 앞세우며 온갖 고초를 견뎌낸 로보캅, 그는 비록 로봇이었지만 '대인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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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공의 이익을 항상 생각하는 로보캅은 2007년 대한민국에도 여전히 교훈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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