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타게 성배를 찾아서

아더 왕의 성배, 현대인의 마음까지 치유하려나?

 <엑스칼리버>(1981)
ⓒ 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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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소재로 즐겨 다루는 만화가 정훈이씨가 영화 <세븐>(1995)을 패러디한 적이 있다. 의문의 연쇄 살인이 일어나자 성서에 나오는 '7대 죄악'을 근거로 벌어지는 살인이라 추리하지만 막상 범인을 잡고 보니 '삼강오륜'이 살인 동기였다는 내용이었다. 할리우드가 즐겨 인용하는 서양 문화권의 보편적인 상징들이 곧 한국인의 상징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였을까?

@BRI@우리에게 아더 왕 이야기는 어린 시절 읽고 지나가는 동화책 정도로 여겨지거나 "희망이면 빛이여 아득한 하늘이여~"로 기억되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미지로 새겨져 있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아더 왕 이야기는 어엿한 '성인용'이다. 아더 왕 이야기를 직접 다루는 영화는 물론 엑스칼리버, 원탁의 기사, 성배를 등장시키는 영화들도 많은 것처럼 아더 왕 이야기는 켈트족 전설을 넘어 오늘날에도 새로운 해석이 더해지는 살아 있는 이야기로 남아 있다.

FBI 심리수사관들이 등장하는 미국 TV 시리즈 <크리미널 마인즈>에는 FBI 요원들을 상대로 수수께끼를 내는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을 찾아낸 심리수사관들 '퍼시벌 경'이라 부르면서 "성배를 찾고 싶다면 질문을 하라"고 외친다. 불행한 사고를 당해 고통받는 그는 FBI 심리수사관들을 원탁의 기사며, 자신은 성배를 갖고 있던 '피셔킹'이라는 망상을 품었던 것이다.

 <크리미널 마인즈-피셔킹>(2006)
ⓒ Touchstone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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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킹은 성배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 죄를 지어 저주를 받아 고통받고 있던 그는 누군가 성배를 찾아 갈 때 구원을 얻게 될 운명이다. 칼 한 자루로 시작한 아더 왕은 끝내 나라를 통일하고 원탁의 기사들과 더불어 인생 최고점에 이르지만 가장 믿었던 기사와 왕비가 불륜에 빠지고 의부누이 사이에서 생견난 아들에게 왕좌를 위협받는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상심에 빠진 아더 왕은 죽음으로 치닫고 원탁의 기사들은 성배를 찾아 떠난다.

엑스칼리버와 원탁의 기사들이 아더 왕의 출세와 절정에 있다면 후반부를 장식하는 성배 이야기는 인생의 시련이나 종말과 함께 한다. 죽어가는 아더 왕을 되살릴 성배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난 원탁의 기사들마저 하나 둘 쓰러져 가니 이젠 성배를 찾는 것 자체가 재앙이 되어 버릴 참이다. 퍼시벌 경은 성배 가까이에 다가서지만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못한 탓에 기회를 놓치고 만다.

다시 떠난 모험 길에서 퍼시벌 경은 올바른 질문을 던지고 성배를 얻고 피셔킹은 구원을 받고 세상을 뜨게 된다. 아더 왕 역시 퍼시벌 경이 가져온 성배로 기력을 되찾고 전쟁에는 승리하지만 영혼의 안식처 아발론으로 떠나게 된다. 성배는 생명을 상징한다고는 하지만 피셔킹과 아더 왕 모두 육체적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완성이랄까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으로 구원받는다.

 <엑스칼리버>(1981)
ⓒ W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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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스럽게도 사람이 살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사실 괴롭고 힘들 때가 더 많다. 잔인한 것은 대개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고 이내 고단한 시절이 뒤따르는 것이다. 게다가 시간은 사람 편이 아니라서 절정에 오른다 싶으면 어느새 내리막으로 접어든다. 나이로 치면 중년에서 노년을 예감하는 지점이거나, 일로 치자면 어느 정도 성공했고 이젠 좀 살만 하다 싶지만 오히려 이런저런 불안을 느끼는 그런 시절이 바로 아더 왕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던 때와 겹쳐 보인다.

영웅담이란 성공담이면서 실패담이다. 영웅은 시련을 딛고 이기는 존재지만, 이겼기에 몰락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아더 왕 이야기가 현대에도 심심치 않게 다뤄지고 할리우드 영화에도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단순한 영웅담을 지나 인생의 성공과 시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성배 이야기는 인생의 시련을 극복하는 것, 인생의 내리막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구원을 찾는 주제와 닿아 있기에 현대적 소재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테리 길리엄 감독의 <피셔킹>(1991)은 현대 뉴욕에서 성배를 찾아 나선다. 거침없는 진행으로 인기 있던 라디오 DJ는 전화 연결된 청취자에게 "재수 없는 여피 놈들 총으로 날려 버려!" 농담하지만 그 농담이 실제 살인극으로 이어지자 거리를 떠돌게 된다. 거리에서 로빈 윌리엄스가 연기하는, 성배를 찾아 헤매는 정신이상자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자기 방송으로 인한 살인극에서 아내를 잃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눈치채셨겠지만 제프 브리지스가 연기하는 DJ는 퍼시벌 경이 될 운명이다. 그는 그 운명을 애써 거부하지만 환각과 공포에 쫓기고 끝내 폭력배들에게 구타당해 혼수상태에 빠진 친구를 위해 성배를 찾아 성벽을, 사실은 어느 부자 집 벽을 기어오른다. 친구가 성배라고 애타게 주장했던 물건은 골프 기념 컵이었지만 어쨌든 성배의 힘이었을까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 때마침 약물 과다 복용으로 죽을 뻔 했던 성배의 주인, 피셔킹 노인마저도 우연히 건드린 경비벨로 인해 구원받는다.

 <피셔킹>(1991)
ⓒ Columb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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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람이라면 성배만 찾으면 이 모든 시련이 끝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겠지만 서양 문화권 사람들에겐 성배는 현대 뉴욕에서도 통하는 나름 보편적인 상징인 셈이다. 물론 조금 까칠하게 덧붙인다면 <피셔킹>의 로빈 월리암스나 <크리미널 마인즈>의 피셔킹 모두 자신이 인텔리거나 인텔리가 가까이에서 영향을 준 사람이었기에 보편적인 것 보다는 어느 정도는 교양을 필요로 하는 것도 같지만.

공교롭게도 <피셔킹>과 비슷한 구조를 가진 영화 <케이 팩스>(2001)에도 제프 브리지스가 출연한다. 자신을 외계인이라 생각하는 정신이상자가 등장하고 외계로 돌아가는 날 구원을 얻는다는 믿음이 등장하는 이 영화에서 제프 브리지스는 아예 정신과 의사로 등장해서 <피셔킹>때보다 더 적극적인 자세로 현대인의 상처에 다가선다. <케이 팩스>의 결말은 이중적이랄까 열린 결말이랄까 외계인일수도 있고 정신이상일 수도 있고 둘 다일수도 있지만 외계인과 외계로의 귀환은 성배 이야기나 아발론의 귀향을 떠올리게 한다.

UFO와 관련한 흥미로운 국내 저작물인 < UFO 신드롬 >에는 중세에는 나타나던 요정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중세에 없던 UFO가 현대에 목격되는 것처럼 같은 현상을 각자 자기 시대에 맞게 바라본 것인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피셔킹>의 성배가 <케이 팩스>의 외계인으로 옮겨간 것 역시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였을까? 기대고 싶은 상징은 달라졌더라도 현대인이 안고 있는 마음의 상처, 인간이라면 직면해야 할 내리막의 문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케이 팩스>(2001)
ⓒ IM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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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아더 왕 이야기는 오랜 기간 여러 나라, 여러 작가들에 의해 쓰여 지고 덧붙여져 간단하게 정리하기는 어렵습니다. 앞부분은 켈트족 전설이라면 원탁의 기사들은 중세 모험담 성격이 짙고 성배 이야기에는 기독교 문화도 스며들어 있으니 말입니다. 영화 기사라 대체로 영화 <엑스칼리버>(1981)를 기준으로 했습니다만 이 영화에도 피셔킹은 생략되어 있죠. 성배를 찾는 기사는 퍼시벌 경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랜슬롯의 아들 갤러헤드 경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역시 <엑스칼리버>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30~40대에겐 아더 왕 이야기는 어려서 TV에서 봤던 일본 애니메이션 기억이 강하겠지만 요즘 청소년들은 온라인 게임의 아이템 이름들로 아더 왕 이야기의 몇 조각을 접할 것입니다. 모쪼록 아더 왕 이야기를 깊게 읽으신 분들께 이 기사의 거친 요약이 무례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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