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에는 미국 대통령 대역이 있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카게무샤' <데이브>

 할리우드에서 되풀이 해서 만들어지고 있는 <왕자와 거지>도 일종의 '정치 대역물'인셈.
ⓒ WB
최근 일본 언론들은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대신해서 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대역이 적어도 두 명은 있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비슷한 외모를 갖추기 위해 성형수술을 받기도 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행동이나 말투도 감쪽같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 대역을 즐겨 세웠던 제갈공명을 기억하는 우리에게 권력자를 위한 대역이란 그리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선 장기 집권을 하고 특히 미국의 적이라 신변 위협을 실감하는 나라에서 대역설이 나온다. 카스트로나 카다피 같은 이름들이 단골로 거론되지만 비밀 중에도 비밀인지라 관계자가 대역이 있다고 증언한 경우는 있어도 대역 자체가 노출된 경우는 없다.

영화라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카게무샤>(1980)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대역을 뜻하는 '카게무샤'는 '그림자 무사'라는 뜻이 있다. 영화 <카게무샤>는 실존 인물이었던 다케다 신겐을 내세워 똑 닮은 외모 탓에 권력자 대역에 나서는 도둑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대역이 아무리 역할을 잘해도 본체에 달린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다. 사람들은 그림자만 보고도 본체처럼 무서워하고 떠받들지만 그렇다고 그림자가 곧 본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처음엔 살기 위해 막강한 권력자의 대역을 시작한 도둑은 점점 자기 배역에 빠져들고 대역이라는 본분을 잊고 본체 노릇을 하려다 한순간 추락하게 된다.

 권력자와 대역을 다룬 대표적인 영화 <카게무샤>.
ⓒ Toho

대역을 하는 사람은 원래 자기와는 다른 삶을 사는 새로운 자극을 경험한다. 하층에 있던 사람이 비록 흉내라도 권력을 누리게 되니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자기를 버리고 남이 되어야 한다는 상황은 정체성 혼란을 부르고 실수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에 짓눌리게 마련이다. 심한 경우엔 원래 자신을 잃어버리는 상황에도 이른다.

할리우드에서 여러 번 영화로 만들어진 <왕자와 거지>도 권력자와 대역이라는 키워드로 읽힌다. 똑 닮은 외모 덕에 대역을 내세우게 되고, 왕자 노릇을 시작한 거지는 어지간하면 그 자리에 오래 있고 싶은 마음이다. 어린이들 보는 영화라 교훈을 주기 위해 왕자도 힘든 자리라는 식으로 대략 정리되지만 가짜 인생이라도 왕자 노릇이 나쁘지만은 않았을 터다.

 할리우드에선 악당 대역을 맡는 액션물도 즐겨 만들어진다. 주인공은 대역에 충실할수록 사악함에 물드는 자신을 보게 마련.
ⓒ Paramount

과학을 좋아하는 할리우드에선 원래 닮지 않은 사람도 얼굴을 뜯어 붙이는 방법으로 대역이 가능하다. 영화 <페이스 오프>(1997) 얘긴데 FBI 요원과 테러리스트는 서로의 인생을 바꿔 체험하게 되는데 제일 증오하던 인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문제다. 성공적인 임무를 위해서는 감쪽같이 굴어야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에게서 멀어져간다.

대역에게 정체성 혼란은 필수인지 <어싸인먼트>(1997)도 그렇다. 사악한 테러리스트 자칼과 똑같이 생긴 탓에 거의 강제로 잡혀가서 자칼 대역으로 훈련받는 주인공은 자칼 옛날 애인까지 동원해서 잠자리 습관까지 배운다. 사악한 테러리스트를 흉내 내다보니 나중에는 원래 자기 성격과 자칼의 성격이 섞인 이상한 영역으로 넘어가 버리고 임무를 마쳤다 해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자질 미달 대통령 보다는 성실한 동네 아저씨가 낫다? 백악관판 카게무샤 <데이브>.
ⓒ WB
대역 노릇이 아름다운 결과를 갖는 영화로 <데이브>(1993)가 있다. 누가 봐도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떠올리게 외모를 가진 대통령이 혼외정사에 무리하게 힘쓰다 혼수상태에 빠지자 평소 대통령 성대모사를 즐기던 동네 스타가 백악관으로 불려 간다. 처음엔 시키는 대로 대역을 하던 주인공은 나름의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밥맛이었던 대통령은 모두의 사랑을 받는 대통령으로 환골탈태. 주인공이 몰래 불러들인 동네 회계사가 엉망진창인 백악관 예산안을 바로 잡아 복지 예산을 만들어내는 대목이 압권이다.

<데이브>가 사랑스러운 건 대역 노릇에서 벗어나 자기 인생을 산다는 해피엔딩 때문이다. 대부분 대역 인생을 마치고 나면 전과 같이 살기 어렵고 거의 모든 영화에선 그늘을 안게 된다. 단지 대통령 흉내를 내던 동네 아저씨가 국정을 바로잡는다. 권력을 탐내기보다는 대역 생활에서 탈출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기초 의원 선거부터 자신의 정치 인생을 시작하는 <데이브>는 대략 교육적이기까지 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 역할을 한 배우들이 신흥 부자들에게 고액의 출연료를 받고 초대받는다고 한다. 주로 저녁 만찬을 같이하는 형식으로 특별한 공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오쩌둥 말투로 같이 식사를 하고 오면 끝이라는데 부자들도 실재 인물과 만난 것처럼 그저 존경하는 분위기로 대한다고 한다. 이런 호사스런 대역 특수(?)도 마오쩌둥이 실존하지 않는 덕에 가능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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