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법조계를 강타하고 있는 것이 '공판중심주의'라면 한동안 미국 법조계를 괴롭혔던 것이 이른바 'CSI 증후군'이었다. 배심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검사건 변호사건 배심원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중요한데, 무작위로 뽑히는 배심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TV에서 본 CSI 시리즈였다는 얘기다. 원래 과학수사라는 것이 지문 감식 하나만 해도 시간이 꽤 걸리고, 유전자나 유골 복원 같은 걸로 가면 몇 달이 넘어가지만 TV에서는 늘 1시간 안에 문제를 해결한다. 배심원들은 과학수사로 모든 걸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정밀한 과학적 증거를 자판기 커피 뽑듯 당장 내놓으라고 요구해서 특히 검사들이 애를 먹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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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는 < CSI 과학수사대 >. 그 중심에는 윌리엄 피터슨이 연기하는 길 그리섬 반장이 있다. |
| ⓒ CBS |
<더 록> <진주만>의 제작자 제리 브룩하이머가 선보였던 < CSI 과학수사대 >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며 본 편인 라스베이거스를 비롯해서 자매편인 마이애미와 뉴욕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미제사건을 다루는 <콜드케이스>, 실종사건을 다루는 < FBI 실종수사대 >, 프로파일링(범행 현장에 남겨진 흔적들을 모아 범인의 성격, 콤플렉스, 취향, 연령대, 성별 등을 추정하는 범죄 심리 분석 기법)을 다룬 <크리미널 마인드>, 성범죄를 다루는 < SVU >, 수학으로 범인을 잡는 <넘버스> 등 새로운 수사물 시대를 이끌었다. < CSI 과학수사대 >의 간판이라 할 길 그리섬 반장이 이직(?) 신청을 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길 그리섬 반장 역을 맡고 있는 윌리엄 피터슨이 현재 출연하고 있는 시즌 7을 끝으로 더 이상 < CSI 과학수사대 >에 출연하지 않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큰 성공을 가져다줬다지만 CSI 생활도 7년차에 접어드니 물릴 때도 되었다. 윌리엄 피터슨은 데뷔 직후 얻었던 몇몇 성공을 빼놓으면 내내 잘 풀리지 않았던 배우다. 윌리엄 피터슨은 우리나라에서 좀 독특한 경로로 알려졌는데, 1980~1990년대에 번성했던 한국 비디오 대여점이 바로 그 무대였다. 콘텐츠에 대한 수요를 채우기 위해 많은 양의 영화가 수입되다 보니 이런 영화가 다 들어오나 싶을 영화들도 여럿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스크린 수가 그리 많지 않던 극장 사정과 맞물려 동네 비디오 대여점은 지역 문화의 최전선이었다. 1992년으로 기억하는데, 비디오 대여점 사장님들이 단골들에게 권하던 영화 중에 <맨헌터>가 있었다. 1986년작인 이 영화를 권해 재고 정리인가 의심했지만 당시 큰 화제를 모았던 개봉작 <양들의 침묵>의 전편이라는 소개를 받으면 눈들이 번쩍 뜨이곤 했다. <맨헌터>는 <양들의 침묵>의 원작자인 리처드 해리스의 <레드 드래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은 2002년에 <레드 드래곤>이라는 영화로 다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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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년 전 <맨헌터>에서 FBI 심리수사관으로 활약하던 '젊은 오빠' 윌리엄 피터슨. <맨헌터>는 그리 좋은 흥행 성적을 내지는 못했지만 열광적인 팬들이 있어 최근 미국에서 한정판 DVD가 발매되었다. |
| ⓒ DEG |
<맨헌터>에 등장하는 FBI 심리수사관 역을 맡은 이가 바로 오늘의 그리섬 반장님, 윌리엄 피터슨이다. 2002년 <레드 드래곤>에서 에드워드 노튼이 맡았던 바로 그 역을 앞서 맡은 것인데, 예리한 심리 수사로 범인을 쫒는 모습을 보자면 14년 뒤에 과학수사대를 이끌 소질을 엿볼 수 있다. <맨헌터>에선 젊은 혈기가 느껴지는 날렵한 이미지라면 < CSI 과학수사대 >에서는 중후한 카리스마가 빛난다는 점이 좀 다르긴 하지만, 그 눈매와 까칠한 수염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하다. <맨헌터>는 <히트> <마이애미 바이스>를 만든 마이클 만 감독의 작품이다.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제작 당시에는 화제를 모았는데 실제 흥행에서는 그리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이때의 인연으로 마이클 만 감독은 <히트>에 출연할 것을 권했지만 윌리엄 피터슨은 거절했다. 어떤 배역을 권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약 <히트>에 출연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참고로 윌리엄 피터슨은 <플래툰> <좋은 친구들> 같은 대박 영화들을 거절한 전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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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연기한 렉터 박사와 비교당하는 처지지만 <맨헌터>에서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한 렉터 박사가 소설에 가깝다. 브라이언 콕스는 악당 역을 꾸준히 맡아왔고 최근에는 <엑스맨 2>에 출연했다. |
| ⓒ DEG |
<맨헌터>에 대한 관객들의 반응은 극과 극인데, 특히 브라이언 콕스가 연기한 렉터 박사에 대한 평가에서 갈리고 있다. <양들의 침묵>에서 안소니 홉킨스가 선보였던 렉터 박사는 선악을 뛰어 넘는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인물이라면, <맨헌터>의 렉터 박사는 그보다는 악당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두운 지하에 도사리고 있는 <양들의 침묵>의 렉터 박사에 비한다면, 하얀색 감방에서 때론 침대에 누워 이죽거리는 모습까지 선보이는 <맨헌터>의 렉터 박사는 더 범죄적이긴 한데 영화적이지는 않다. <맨헌터>에서 연쇄살인범으로 등장하는 톰 누난 역시 카리스마가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지만, 브라이언 콕스의 렉터 박사와 함께 원작 소설에 가까운 이미지라 평가받고 있다. 톰 누난은 2002년 < CSI 과학수사대 > 시즌 3에서 마술을 이용해서 살인을 시도하는 악역으로 등장해, 이제는 그리섬 반장님이 된 윌리엄 피터슨과 재회했다. 둘이 <맨헌터> 시절을 돌이키며 회포를 풀었는지는 모르겠다. 마지막에 탈출을 암시하는, 나름대로 신비한 캐릭터로 그려진 것은 일종의 '전관예우'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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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헌터>에서 연쇄살인범 역을 맡은 톰 누난은 <맨헌터> 감독이었던 마이클 만의 <히트>에 출연했다. 윌리엄 피터슨도 <히트> 출연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만약 출연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
| ⓒ DEG |
배우는 배우 자신으로 살기도 하고 캐릭터로 살기도 한다. 잘 짜인 배우와 캐릭터를 나누는 것은 관객은 물론 배우 자신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배우가 어떤 캐릭터로 각인되는 것은 복이 되기도 하고 족쇄가 되기도 한다. <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천사 역으로 등장했던 피터 포크도 무게 있는 연기를 펼칠 때 "형사 콜롬보잖아?"하던 반응을 감당해야 했다. 시리즈가 길어지면서 좀 시들해졌다고는 하지만 < CSI 과학수사대 >가 누리는 인기, 산업에서 발휘하는 영향력은 여전히 크다. 그 중에 그리섬 반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시카고로 가서 연극 무대에 서고 싶다는 윌리엄 피터슨의 바람이 무난히 이뤄질지는 알 수 없다. 그리섬 반장님을 더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고, 윌리엄 피터슨이 배우로서 자기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도 든다. 그런데 길 그리섬과 윌리엄 피터슨은 같은 사람인가 다른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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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맨헌터> 이후 16년. 윌리엄 피터슨과 톰 누난은 < CSI 과학수사대>에서 다시 만난다. 윌리엄 피터슨은 그리섬 반장 역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7년차로 접어드는 과학수사대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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