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장가는 한창 전쟁 중이다. 아직까지 어느 영화가 왕좌에 오를지 모르겠지만 블록버스터 틈새시장을 잘 활용해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가 있다. 영화 <작업의 정석>이다.

어느 해보다 눈이 많이 오는 올해, 두 손 맞잡고 걸어 다니는 연인들이 유독 눈에 밟힌다. 캐럴과 크리스마스 그리고 새해. 이 모든 게 솔로들에게는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솔로들을 위한 '작업의 정석'이 나왔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수학의 정석이 아니니 따분하지도 않고 머리를 써야 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영화관 앞으로 가 예매를 하고 한 손에는 팝콘 한 손에는 콜라를 들고 처음부터 끝까지 웃을 준비를 하고 있으면 되니 '작업의 정석'을 배우기가 얼마나 손쉬운가.

영화 <태풍>이 모든 영화관을 점령해 흥행 성적이 불투명한 상황이었지만 태풍에 대한 비판 여론에다 역시 겨울에는 로맨스가 통한다는 공식에 힘입어 14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순항 중이다.

게다가 청순가련형의 대명사 손예진의 변신과 <해신>에서 강렬한 눈빛을 선사하던 송일국이 느끼한 작업 멘트와 표정으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관객들에게는 신선함으로 작용된 듯 하다.

물론 영화는 제목처럼 정석대로 할리우드 로멘틱코미디 법칙을 따라가고는 있지만 에피소드의 남발로 로맨스의 바이블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개연성과 설득력이 떨어지고 다소 산만해 보는 이로 하여금 그저 실없는 웃음만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소개하고자 하는 이유는 '손예진의 재발견'때문이다. 그럼 먼저 영화이야기를 하고 난 후 손예진에 대한 재발견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톡 쏘는 콜라가 되지 못한 '작업의 정석'

로맨스 영화는 대개 발단-전개-위기-결말 순으로 그 내용이 이어지면서 결말은 대개가 해피엔딩이다. 그러다 보니 '식상하다'는 반응을 쉽게 보일 수 있다. 차별성이라고 해봤자 아기자기한 구성과 톡톡 튀는 대사 혹은 기존 로맨틱 코미디 방식을 한 번 뒤틀어서 보여주는 정도.

영화 <작업의 정석>은 뒤틀기 대신 기본 공식을 충실히 따르고자 작정한 듯 하다. 특히 작업이라는 소재를 다루다 보니 로맨스 영화의 설렘, 떨림은 찾아보기 힘들다. 애당초 그러한 감정들이 껴들 틈이 없다.

그래서 기본 공식을 충실히 하되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대사에 치중했다. 특히 <안녕 프란체스카>의 신정구 작가가 각본을 썼으니 그의 의존도는 어느 때보다 더하다. 그런데 결과는 신정구의 입심이 너무 과하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을 만들어낸다.

▲ <작업의 정석>에서 '망가진' 손예진
ⓒ 청어람
작업계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대표선수' 수지원(손예진 분)과 민준(송일국 분). 그들이 만났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보는 법! 작업계의 고수로 소문난 이들에게 민준과 지원은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보통 남녀에게 하는 방법으로 슬쩍 서로를 떠보는 우리의 작업남녀! 하지만 이들에게 평범한 작업버전이 통할 리 없다. 드디어 그동안 갈고 닦은 비장의 작업기술을 실전 테스트할 상대를 만난 민준과 지원의 작업대결은 슬슬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드디어 '적수를 만났다'를 외치며 쾌재를 불렀던 두 사람. 치밀한 물밑 작업을 거쳐 본격 작업 대결에 들어간 민준과 지원이건만, 백발백중 먹혔던 그들의 작업은 자꾸만 '삑사리'가 난다. 절대지존으로서 작업 내공은 무너질 대로 무너지고 최고의 작업 선수라는 자부심마저 흔들리기 시작할 때!

자신만만 지원의 화려한 작업 노하우도, 여유만만 민준의 노련한 작업 테크닉도,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을 당해낼 비법은 없음을 어렴풋이 깨달아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진정한 프로는 승부를 보기 전까진 경기를 멈추지 않는 법. 작업의 진검승부를 펼치는 마지막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그리고 수많은 작업에서 살아남은 자에게만 주어지는 로맨스의 달콤함을 그들도 누릴 수 있는 걸까?

결국 영화는 사랑에 있어 기술보다는 진심이 우월하는 것을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것으로 끝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부담 없는 영화라는 점이다. 재미있는 주조연 캐릭터들, 인물들이 활동하는 럭셔리한 공간까지 로멘틱 코미디 성공법칙에 충실하다. 그런데 각 에피소드의 나열이 너무 산만하여 개연성과 설득력이 떨어진다. 또한 웃음을 유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듯 억지 에피소드가 곳곳에 눈에 밟힌다.

노예팅에서 친구 엄마에게 팔려가는 민준, 태풍이 몰아치는 제주도에 작은 전용기로 날아와 아를 민준에게 도움을 주는 아버지, 보트를 타고 바다를 건너면서까지 지원의 연애를 방해하는 옛 남자 친구, 이 같은 부담스러운 설정 때문에 오히려 웃음이 반감된다.

손예진 새로운 날개를 달다

그러나 우리에겐 손예진의 재발견이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마치 청순의 대표미인 심은하가 <미술관 옆 동물원>의 춘희가 되었듯 김하늘이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촌닭 수완이 되어 새로운 매력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이야기 한 심은하, 김하늘은 모두 청순미인에서 왈가닥 연기 변신에 성공을 하며 모두들 영화배우로 거듭난 인물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안티팬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손예진은 천사표, 청순가련형의 대표주자였지만 그만큼 언니들의 안티의 대상이 되었다. 어느 상대배우와 호흡을 마치더라도 안티들은 그녀를 가만두지 않았다.

이유없는 남자들의 보호 아래 남자들 속에서 갈팡질팡 우유부단한 모습(여름향기), 외출에서는 어떠했는가. 남편의 부정, 사고 그리고 죽음을 겪으면서도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투명 메이크업에 은은한 립스틱이 다였다. 그것이 이제까지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녀가 무도회장에서 물을 뿌리며 한 가운데 스테이지에서 유혹의 춤사위를 선보였다. 이것은 180도 변신을 예고한 셈이다.

심은하가 호호호! 인디언 환호성을 외치며, 김하늘이 성인식 음악에 맞춰 막춤을 선보였던 것처럼 전혀 관객들이 예상할 수 없던 일이다. 남자 배우들의 후광을 등에 업은 모양새에서 송일국을 리드하며 진정한 원톱 주인공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이다.

그녀의 작업 도구 내숭은 뻔뻔함과 귀여움으로 포장됐고 그녀의 행동과 말투, 표정은 이전과 달리 살아있었다. 또한 그녀의 코믹연기 변신도 부자연스럽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모습이 실제 손예진이 아닐까 고개를 갸우뚱 할 정도로 연기의 물이 올라있었다.

이것만으로도 올해의 발견은 손예진이다. 물론 아직은 이르다. 그녀가 언제 다시 눈물의 여왕으로 돌아와 똑같은 눈물과 표정을 보여줄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의 연기 폭이 한 단계 넓어졌음을, 좀 더 자연스러운 일상을 그릴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의미에서 손예진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5-12-30 11:36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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